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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건의 유배의 뒤안길] 봄날의 예의

[양진건의 유배의 뒤안길] 봄날의 예의

입력 2018-03-06 17:54
업데이트 2018-03-06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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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건 제주대 교수
양진건 제주대 교수
봄이다. 꽃의 계절의 시작이다. 봄이 가장 빠른 제주도에는 이제 앞다투며 여러 꽃들이 피어날 것이다. “한라산에는 눈이 잔뜩 쌓였고, 산 아래는 꽃들이 화려하게 피었다”(漢挐之山積雪甚厚 而山下則花事爛熳)고 유배인 송시열이 지적했던 바로 그 이색적인 풍경이 곧 펼쳐질 것이다. 유채꽃, 벚꽃, 철쭉, 영산홍 등등 계속되는 향연을 보고자 구경꾼들이 몰려들 것이다. 그들은 그 꽃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예전에는 꽃을 보며 술과 시를 함께 즐기던 풍류가 있었다. 벚과 함께 꽃구경을 하며 술을 마시고 시를 짓는 일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던 것이다. 이런 모임을 상화회(賞花會)라 하였다. 뜻이 맞는 벚들을 불러 “상화회를 하며 술잔을 날리고 시를 지었으니 그 풍류가 개울과 산을 비추었다”고 했다. 그러나 꽃구경을 핑계로 먹고 마시는 일이 이 풍류의 목적이 아니었다.

의주에서 유배 생활을 했던 조선 선조 때 이제신은 겨울에 얼어 죽지 않도록 네 그루 철쭉을 멍석으로 싸 주었는데 급히 멍석이 필요해 하나를 풀어야 했다. 봄이 되자 세 그루는 꽃을 피웠지만 멍석을 먼저 푼 철쭉은 봄이 다 가도 꽃소식이 없었다. 그러다가 느지막이 꽃을 피우더니 석 달 이상이나 계속됐다. 추위라는 시련이 철쭉의 수명을 길게 했던 것이다. 이렇게 꽃의 이치를 인생사에 적용해 성찰하려 했던 모임이 바로 상화회였다.

제주도에 수선화가 얼마나 많이 피었던지 유배인 김정희는 “바다로 둘러싸인 섬마을 사백리에 온통 수선화가 만발했다”고 경탄했다. 오죽했으면 ‘천하에 큰 구경거리’(天下大觀)라고 했겠는가. 이것을 보면서 김정희는 “호미 끝에 아무렇게나 이리저리 캐 버린 것을 깨끗한 책상 앞에 고이 옮겨 심었네”라며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수선화가 유배를 당한 자신의 처지와 닮았음을 보았다. 이 또한 수선화를 통해 자신의 인생사를 성찰한 예다. 그런데 이런 성찰을 하려면 최소한의 원칙을 지켜야 했다. 조선 정조 때 권상신이 말한 것처럼 “꽃구경을 하는 사람 중에 꽃을 꺾는 것을 즐겁게 여기는 이가 있는데, 매우 의미 없는 짓이다. 봄의 신이 꽃을 키우는 일은 마치 농부가 곡식을 키우는 것과 같다. 꽃들이 모두 괴로워할 것이다. 꽃들도 자연의 생의(生意)가 무성한 존재이니, 무릇 우리 함께 노니는 이들이 차마 꺾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여 꽃을 꺾는 일을 경계했다. 물론 술과 시에 대한 원칙도 있었다.

꽃구경을 할 때 꽃을 꺾지 말아야 함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요즘 우리는 이 너무도 당연한 일도 지키지 못한다. 이 당연히 지켜야 할 것을 예법이라 했다. 예법이란 예의로 지켜야 할 규범이나 법칙을 말한다. 물론 예법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중요한 것은 예법을 지키지 못한다면 우리가 아무리 꽃을 보고, 삼라만상을 본다 한들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모든 예의는 궁극적으로 사람에 대한 예의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제 봄꽃들이 마구 필 것이다. 필자는 출퇴근길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왕벚꽃 행렬과 부딪칠 때마다 매년 꽃멀미로 홍역을 치르곤 했다. 그래서 애써 고개를 숙여 왕벚꽃들을 외면하고 다녔는데 그것도 꽃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에 올봄부터는 제대로 머리 들어 꽃구경을 해 보고자 한다. 이번 봄날에 꽃만이 아니라 삼라만상을 구경하러 멀고 가까운 곳으로 떠나는 사람들마다 그에 맞는 예의를 지킴으로써 자신들의 인생사를 보다 풍성하게 성찰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귀한 시간이 어디 있을까 싶다.
2018-03-07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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