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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의 오솔길] 오월 애인

[이재무의 오솔길] 오월 애인

입력 2018-05-07 17:48
업데이트 2018-05-07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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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월을 좋아한다. 예부터 오월이 계절의 여왕이라 불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오월은 일 년 중 가장 맑고 온화한 날씨가 많은 달이고 꽃보다 아름다운 연초록 광휘가 눈부시게 빛나는 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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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에는 24절기 가운데 입하(立夏)와 소만(小滿)이 들어 있다. 입하는 양력 5월 5일 무렵으로 여름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절후다. ‘보리가 익을 무렵의 서늘한 날씨라는 뜻으로 맥량(麥凉), 맥추(麥秋)라고도 하며, 초여름이란 뜻으로 맹하(孟夏)라고도 부른다. 소만(小滿)은 양력으로 5월 21일 무렵으로 햇빛이 풍부하고 만물이 점차 생장해 가득 찬다(滿)는 의미가 있다.
이재무 시인
이재무 시인
이렇듯 오월은 겨우내 움츠렸던 사물들이 몸을 풀어 왕성하게 생명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달이다. 사물들의 생장하는 모습은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힘을 솟구치게 한다.

오월의 두 절기 중 나는 입하를 더 편애하는 편인데 까닭은 입하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풍경 때문이다.

오월은 모내기 철이다. 모내기는 못자리에서 기른 모를 본 논에 옮겨 심는 일을 말하는 것으로서 모심기라고도 한다. 모내기는 모를 심기 전 마른 논에 물을 채우는 것으로 시작된다. 겨우내 마른 논이 수문을 따라 들어오는 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모습은 미상불 보기에 좋다. 그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마른 논에 물 들어가는 것과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이 가장 보기에 좋다’는 옛말이 절로 떠오른다. 마른 논이 수문을 따라 천천히 들어오는 물을 마실 때 가만히 눈여겨보면 논의 몸속으로 들어와 가득 차는 것은 물만이 아니다. 산 너머 자주 형상을 바꾸며 저희끼리 희희낙락 시간을 즐기며 해찰해 대던 구름 서너 마리도 불현듯 수문을 따라 겅중겅중 들어와서는 논바닥 이곳저곳에 제 가벼운 그림자를 옅고 길게 떨어뜨리는 것을 볼 수 있다.

논에 물이 들어차면서 갑작스레 새로이 생겨난 물벌레들은 흙탕을 일으켜 흙의 뭉친 근육들을 풀어 준다. 무논은 갑자기 활기를 띠며 무수한 생명체가 활동하는 장이 된다. 본 논에 가득 물이 들어차자 이번엔 논둑에서 겨우내 저 혼자 가지 자락을 펄럭이며 심심하게 서 있던 미루나무도 나른한 정오를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배춧속처럼 뽀얗게 차오르는 수면 안으로 길게 손과 발을 뻗어 오면서 기지개를 켠다.

그리하여 그 기지개 덕에 미루나무의 키가 한 자는 더 웃자라게 되는 것인데, 오후 들어서는 골짜기 박차고 나온 꽁지 붉은 새 몇 마리가 무논에 그림자를 흩트리고 공중 곡예를 부리며 노란 울음 방울을 바닥에 떨어뜨려 푸르게 무늬를 짓는다. 이러한 때에 송아지 혀처럼 부드럽게 불어오는 바람에 찰랑대는 무논은 직선으로 내리꽂히는 햇살, 해의 살을 되받아 내며 은빛을 사방팔방으로 튕겨 대곤 한다.

삼동 내 마른 명태처럼 누워 있던 논이 벌떡 일어나 그 큰 입으로 도랑의 옆구리를 비집고 들어오는 물로 오래 시달려 온 가뭄을 해갈하실 때 하늘은 더욱 청명하여 드높고, 삽자루 어깨에 둘러멘 채 물꼬를 보러 나온 예비군복 바지의 팔자걸음이 풍선처럼 가볍다. 그리하여 세상은 짚세기로 문질러 닦아 놓은 놋주발처럼 투명, 투명하여서 갑자기 생이 눈부셔 어리둥절해진다.

오월의 들판은 인간이 땅에 속한 자손이라는 것을 실감케 해 준다. 운 좋게 한밤중 들판을 걷다가 무논 이곳저곳에 핀 별꽃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늦가을 다 익은 벼들이 왜 별 모양을 하고 있는지 그 비밀을 눈치챌 수 있으리라. 무논의 모들은 낮 동안 농사꾼이 돌보게 되고 한밤중에는 별들이 내려와 살핀다는 상상이 절로 들 것이다. 과연 늦가을 벼 이삭이 별의 형상으로 영그는 것은 하늘이 농사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고개를 끄덕일 법도 하다.

오월이 나는 좋다. 오월은 나를 젊게 하고 생동하는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내게 오월은 계절의 애인이다. 그녀와 팔짱을 낀 채 푸른 내가 진동하는 들길을 망아의 상태로 질정 없이 걷고 싶다.
2018-05-08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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