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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백윤 기자의 남과 如] 안경 쓴 공주가 왕자를 구할 때까지

[허백윤 기자의 남과 如] 안경 쓴 공주가 왕자를 구할 때까지

허백윤 기자
허백윤 기자
입력 2018-05-08 17:36
업데이트 2018-05-08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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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백윤 사회부 기자
허백윤 사회부 기자
올해 다섯 살인 딸의 엄마가 되고부터 아이가 어떤 종류든 ‘한계’에 부딪히는 경험을 최대한 늦출 수 있길 바라고 있다. 특히 자신의 능력과는 전혀 상관없는 성별이라는 벽에 잠재력을 잃지 않도록 애쓰고 싶다. 돌이켜 보면 내가 “넌 여자라서 안 돼”라는 말을 들으며 자란 것이 아닌데도, 기억할 수조차 없이 수많은 새김들이 내 안에 있기에 일부러라도 아이에게 유난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가장 눈에 띄게 할 수 있는 건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주는 것이었다. 여전히 아이가 접하는 많은 시선에 아빠는 나가서 돈을 벌어 오는 사람이고 엄마는 집안일하며 기다리는 사람이라, 생각보다 내가 할 수 있는 노력도 많아 보였다. 한두 살 때, 우는 아이도 뚝 그치게 만드는 고마운 뽀로로에서부터 은근한 불쾌함을 느꼈지만 아이가 말귀를 못 알아들으니 그냥 두었다. 여성 캐릭터인 분홍색 루피는 요리를 즐겨 하며 친구들에게 상냥하게 간식을 만들어 준다. 그러면서도 자주 삐치는데, 특히 새로운 꽃 모양 머리핀을 친구들이 알아봐 주지 않자 하루 종일 잔뜩 골이 난 장면에선 아이의 울음을 각오하고도 TV를 꺼버리고 싶었다.

서너 살 때 즐겨 보던 만화에서는 엄마가 워킹맘으로 등장했지만, 프리랜서인지, 유연근무제 혜택을 받는지 주로 집에서 전화로 일을 했고 일을 하면서도 둘째를 보느라 종종거렸다. 주인공인 첫째 딸에겐 “엄마 일해야 하니까 저리 가 있어”라며 매몰찼다. 그 집 아빠는 가끔씩 큰맘 먹고 어렵게 시간을 내 놀아 주는데 그마저도 일이 생기면 다시 일터로 달려갔다.

가만히 누워 왕자님의 키스를 기다리는 수많은 공주님들의 이야기는 거의 범죄 수준이라 아직 한글을 모르는 아이에게 조금씩 각색을 해 준다. “마녀같이 낯선 사람이 주는 사과는 절대 먹으면 안 돼.” “모르는 남자가 뽀뽀를 하면 안 되는 거야.” 동화인데 뭘 그렇게까지 하냐 싶겠지만 백설공주와 신데렐라가 머릿속 한 공간을 평생 차지하고 있는 것을 떠올리면 더더욱 슬기로운 결말을 주고 싶다. 딸이 뽀로로와 에디처럼 호기심 가득하고 모험을 즐기며 창의적이길 바라고, 어려움을 씩씩하게 이겨 내고 오히려 쓰러져 도움을 청하는 왕자를 구해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본능인가 싶을 만큼 정작 딸은 공주 인형들의 아름다움이 자신의 것이길 꿈꾸며 분홍색과 레이스 치마에 사족을 못 쓰지만 그것이 꼭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게 아니면 된다.

최근 한 여성 아나운서가 안경을 쓰고 뉴스를 진행해 큰 화제를 모았다. 곧 한 항공사 승무원들도 안경을 쓰기로 했다. ‘그동안 안경을 안 썼나?’라는 새삼스러움이 많은 이들에게 일종의 충격을 준 것 같았다. 고정관념은 마주할수록 오히려 어색한 것이다. 이제서야 안경 한 짝을 허용한 뉴스도 아직 대부분은 정치, 사회 분야 톱뉴스는 중년의 남성 앵커가 먼저 보도한 뒤 후순위 뉴스들을 상대적으로 젊은 여성 앵커가 전달하고 있지 않나. 둘러보면 중요한 순서대로 남성들의 것인 게 여전히 많고, 여성들은 얼굴에서 아직도 자유롭지 못하다. 공주들이 안경을 쓰고 바지를 입고 용감하게 왕자를 구해 주는 날이 오기까지 할 일이 많다.

baikyoon@seoul.co.kr
2018-05-09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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