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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세상] 9호선 지하철 탑승기, 분노하거나 도를 닦거나/김세정 런던 그린우즈 GRM LLP 변호사

[열린세상] 9호선 지하철 탑승기, 분노하거나 도를 닦거나/김세정 런던 그린우즈 GRM LLP 변호사

입력 2018-10-30 17:40
업데이트 2018-10-30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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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여름 서울에 갔을 때 9호선 지하철을 탔다. 9호선을 탄 것은 처음이었다. 서울을 떠난 이후 생긴 노선이기 때문이다. 강남 쪽에서 여의도를 거쳐 가야 했는데, 친구가 이 시간에는 도로가 많이 막힐 거라고 했다. 저녁 약속에 맞추어 가는 길이었다. 언젠가 강남대로 한복판에서 꼼짝달싹 못 하고 갇혀 있었던 적이 있는데, 그 넓은 대로에 그렇게나 많은 차들이 가득 차 조금도 못 움직이고 서 있는 광경을 보고 좀 장관이라고 감탄했다. 런던도 차가 막히는 도시지만, 런던의 도로들은 넓어 봤자 편도 2차선 정도다. 그러니 이런 거대한 주차장과도 같은 장면을 연출할 수는 없다. 그때 물론 약속에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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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정 바르샤바 SSW 프래그마틱 솔루션스 변호사
김세정 바르샤바 SSW 프래그마틱 솔루션스 변호사
충고대로 지하철을 탔는데, 새로 생긴 노선이라 그런지 런던의 지하철보다 매우 좋더라고. 깨끗하고 넓고 모던하다. 런던 지하철은 낡고 좁고 우중충하다. 무엇보다 대개 지하철에 에어컨이 설치돼 있지 않으니 여름에 지하철을 타는 것은 꽤나 고역이다. 서울의 지하철은 여름이면 시원하다 못해 춥고 겨울이면 더울 정도로 난방이 되지 않던가.

어쨌거나 9호선 지하철을 타고 서서 가기 시작했다. 조금 멀리 빈자리가 하나 있기는 했는데, 굳이 거기까지 가서 앉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서울의 지하철은 런던에 비해 진동도 심하지 않다. 처음에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서서 가도 될 것 같았던 것이다. 이 결정이 착각이요 패착이었다는 건 그리 머지않아 깨닫게 됐다.

한두 정거장 지나니 사람들이 그야말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치 사람으로 구성된 쓰나미처럼. 지하철 안의 모든 것을 덮칠 듯이 사람들이 한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기세란. 정말이지 사람들이 꽉꽉 들어차는데, 바늘 하나 더 꽂을 자리가 없다는 말이 실감 났다.

영국뿐 아니라 서구 사회에서 타인의 몸에 닿지 않는 것은 아주 기본적인 예의다. 이는 혼잡한 시간의 대중교통에서도 마찬가지다. 실수로라도 타인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만일 다른 사람의 몸에 닿으면 미안하다고 사과를 한다. 그러니 남을 밀치거나 하면서 혼잡한 차에 올라타는 일은 보기 어렵다. 올라탈 공간이 없을 것 같으면 포기하고 다음 차를 탄다. 반드시 그 차를 타야만 할 사정이 있는 경우 미안하지만 좀 타겠다고 부탁을 하면 이미 탄 사람들이 어떻게든 움직여 공간을 만들어 준다. 물론 사정을 해도 꼼짝도 하지 않는 매정한 사람들도 있게 마련이니 이 경우에는 급박함의 정도와 투덜거림을 참아 낼 수 있는 신경줄의 두께 등을 고려해 결행할 일이다. 하지만 이때도 가능하면 신체 접촉을 피하고 대개는 연신 미안하다고 사과를 한다.

아무튼 다시 9호선. 당시 바로 왼쪽에는 젊은 여성이 서 있었는데, 손에 든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손잡이는 아예 잡지 않고 온몸을 그저 나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나는 오른쪽 사람에게 닿지 않으려고 손잡이를 악착같이 잡고 버티는 동시에 왼쪽 사람의 체중을 고스란히 받아내야만 했던 것이다.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사실은 그토록 붐비는 지하철 안에서 매너니 개인적 공간을 논하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돼 버렸다. 그 지경이면 그냥 열차가 가면 가는 대로, 멈추면 멈추는 대로 흔들리면서 옆사람에게 자기 체중을 의지하면서 또한 옆사람의 체중을 온몸으로 받아 내면서 그렇게 가는 거다. 옆사람을 견디거나, 싫어하거나, 화를 내거나 아니면 불쌍하게 여기거나 하면서.

나중에 물어보니 어제오늘 일도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그게 맞는 일인가. 사람이 사람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 말이다. 아침저녁으로 그런 지하철을 타고, 화가 난 채로 하루를 시작하고 진저리를 치며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정상인가.

정책을 결정할 수 있는 분들에게 꼭 9호선을 타시라고 권하고 싶다. 어쩌다 시민들을 만난다며 이벤트로 타지 말고 9호선을 그것도 붐비는 출퇴근 시간에 타라는 이야기다. 신영복은 여름의 감옥이 더 끔찍하다고 했다. 동료 재소자를 미워하게 되기 때문에. 선량한 시민이 다른 선량한 시민을 미워하기 딱 좋은 것이 9호선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한국에서 살아가기가 그와 유사한가 싶었다. 분노로 가득차게 되거나 도를 닦게 되겠더라.
2018-10-31 3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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