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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을 위한 넓은 들판, 서울에 삽니다

명상을 위한 넓은 들판, 서울에 삽니다

이슬기 기자
입력 2018-11-07 22:40
업데이트 2018-11-08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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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아웃사이더 콜롬비아 작가 안드레스 솔라노 ‘한국에 삽니다’ 출간

한동안 외국인들이 등장하는 TV 예능 프로그램들이 인기를 끌었다. 그들은 뜬금없는 상찬으로 우리가 잊고 있던 것들의 가치를 재발견해 주거나 때로는 날 선 비판으로 정신을 번뜩 들게 했다. 한국인 뺨치는 현란한 술자리 매너들이 그들의 ‘인싸력’(집단에 소속돼 잘 소통하고 어울릴 수 있는 능력)을 증명했다.

그런데 여기 이 사람, 좀 다르다. 굳이 인사이더가 되려고 애쓰지도 않고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섣부른 판단도 유보한다. 지구 반대편에서도 나 자신으로 살려고 했던 ‘자발적 아웃사이더’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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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국에 삽니다’에서 ‘허송세월 보내기의 수호성인’ 이집트 망명 작가 알베르 코세리처럼 살겠다는 바람을 피력한 안드레스 솔라노. 그러나 그는 영화 시나리오 작업과 새 소설 준비로 ‘코세리를 배신하듯’ 눈코 뜰 새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사진은 책의 배경이 된 서울 이태원의 낡은 연립주택에서 살던 시절의 솔라노.  은행나무 제공
책 ‘한국에 삽니다’에서 ‘허송세월 보내기의 수호성인’ 이집트 망명 작가 알베르 코세리처럼 살겠다는 바람을 피력한 안드레스 솔라노. 그러나 그는 영화 시나리오 작업과 새 소설 준비로 ‘코세리를 배신하듯’ 눈코 뜰 새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사진은 책의 배경이 된 서울 이태원의 낡은 연립주택에서 살던 시절의 솔라노.
은행나무 제공
●콜롬비아·英이 주목한 서울살이 이야기

최근 에세이 ‘한국에 삽니다’를 출간한 콜롬비아 작가 안드레스 솔라노(41). 결혼과 함께 2013년 1월부터 시작된 서울살이를 담은 ‘한국에 삽니다’는 2016년 콜롬비아 소설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그 덕에 영국 문학잡지 ‘그랜타’가 선정한 ‘스페인어권 최고의 젊은 작가 22인’ 중 한 명으로 꼽히기도 했다. 지난 6일 그와 그의 아내 이수정(37)씨를 서울 이태원 자택에서 만났다.

“한국어는 늘었나”라고 대뜸 물었다. 그는 “너무 부끄럽다”며 민망해했다. 한국말이 능숙하지 못한 솔라노에게 서울은 ‘명상을 위한 넓은 들판’이다. 대신 그는 언어가 거세된 상태에서 다른 관점으로 서울을 본다. “지하철 같은 데 있으면 사람들 대화가 잘 안 들리니까 눈으로 사람들을 더 관찰하게 된다. 색색깔 현란한 아줌마 패션도 그렇고. 패션 크리틱(fashion critic, 패션비평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선입견 없이 본 한국, 새로운 표현 필요해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선입견 없이 한국을 만난다. 가령 버스에서 질서 정연하게 하차하며 버스 카드를 찍고, 잠깐 휴식 시간 동안 택시기사들이 자신의 밥벌이 수단인 택시를 도구 삼아 스트레칭하는 장면 등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아무래도 이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형용사를 만들어 내야 할 듯하다.”(147쪽) 솔라노가 보기에 한국 사람들은 한시도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는다. “건강 관리를 하든지, 자기 계발에 힘쓰든지…. 늘 뭐든 하고 있더라.”

그러나 그런 풍경들이 그에게 좋고 나쁨의 영역은 아니다. ‘납으로 된 옷을 입은 것만큼 무거운’ 한국 살이는, 유독 한국이어서 그런 거냐고 물었더니 그건 아니란다. (그는 스페인에서도 거주한 경험이 있다.) 그러면? “한국에 살면서 받는 특정 자극들이 나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해 준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책이) 여행 안내서라든지 외국인이 한국에서 살면서 겪는 좌충우돌하는 기록들과는 다르다.” 소설가 김인숙이 쓴 추천사 중 “낯선 곳에서 바라보는 자신의 내부, 타인의 내부를 통해 바라보는 나의 우리들의 외부, 이 책은 그 경계에 대한 이야기”라는 부분과 일맥상통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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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 서울 이태원 자택에서 포즈를 취한 안드레스 솔라노(왼쪽) 작가와 부인 이수정씨. 2008년 한국문학번역원 초청 연수 작가로 한국을 방문한 솔라노는 당시 한국어세계화재단에서 사업 코디네이터로 일하던 이씨와 ‘일하다가 만나’ 불같은 사랑에 빠졌다.  최해국 선임기자 seaworld@seoul.co.kr
지난 6일 서울 이태원 자택에서 포즈를 취한 안드레스 솔라노(왼쪽) 작가와 부인 이수정씨. 2008년 한국문학번역원 초청 연수 작가로 한국을 방문한 솔라노는 당시 한국어세계화재단에서 사업 코디네이터로 일하던 이씨와 ‘일하다가 만나’ 불같은 사랑에 빠졌다.
최해국 선임기자 seaworld@seoul.co.kr
●‘거기서 거기’ 한국 소설만큼은 날 선 비판

거의 유일하게 솔라노가 날 선 비판을 쏟아내는 부분은 ‘거기서 거기’인 한국 소설이다. 한국문학번역원의 번역아카데미 교수로 일하는 솔라노는 스페인어로 번역된 한국 소설들을 많이 접한다. 그는 제1·2차 세계대전, 베트남전처럼 한국에서도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블랙 코미디물이 나오기를 바란다.

솔라노에게 ‘거기서 거기’가 아니었던 소설은 박민규의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 오정희의 ‘붉은 강’, 김승옥의 ‘무진기행’이다. 하나같이 “섹슈얼한 긴장감이 돋보이는” 작품들이다.

●번역한 아내 “남편 마음의 소리 들어 좋아”

‘한국에 삽니다’의 번역은 공연기획자인 아내 수정씨가 했다. 부부 싸움 끝 ‘X발, 사라져버려, 라고 말할 뻔했다’ 등 남편의 마음속 소리를 듣는 기분은 어떤 것이었을까. “진짜 좋았어요. 나도 그런 비슷한 생각을 하는데 자연스러운 욕망을 솔직하게 얘기할 수 있는 거 자체가 서로 신뢰가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라 오히려 고마웠어요.”

인터뷰 초반엔 부지런히 커피를 나르던 그가 말미에 가져온 것은 위스키와 노가리 사촌쯤 되는 말린 생선 포였다. 일본에서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뒤를 이을 강력한 후보자’ 얘기를 듣는 그에게 책이 섹시하다고 했더니 건배 제의와 함께 이런 답이 왔다. “I like that words.” 위스키와 노가리라니, 나름 타국인으로서 한국에 사는 최상의 조합을 찾은 것 같았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2018-11-08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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