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특검 수사를 바라보는 두 개의 여론
“사실상 총수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없으면 삼성은 무너지나. 삼성의 위기는 한국 경제의 위기인가.”최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신병 처리를 둘러싸고 불거진 이 논란은 역설적으로 삼성이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보여준다.
경제계에서는 이 부회장의 공백이 삼성, 나아가 나라 경제에 미치는 파장을 우려한다.
반면 이런 논리를 ‘엄살’ 또는 ‘위협’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개인의 위기가 삼성의 위기는 아니며, 오히려 기업 총수에 대한 ‘차별적 배려’가 글로벌 시장에서 경제의 위기로 돌아온다고 반박한다.
◇ “한국식 총수 경영이 성장의 힘…‘월급쟁이 사장’으로 대체 불가”
“해당 기업은 물론 우리 경제의 국제 신인도가 크게 추락해 국부 훼손으로 이어질 우려가 크다”(한국경영자총협회),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이라는 점에서 한국 경제에 미칠 파장이 매우 걱정스럽다”(대한상공회의소)
지난 16일 특검이 이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하자 경제단체들이 앞다퉈 발표한 입장이다. 경제적 피해를 고려해 기업인 수사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논리다.
재계에서는 총수 부재로 인한 충격이 꽤 장기적이고 치명적이라고 주장한다.
불확실성이 증폭된 경영환경에서 대규모 투자, 인수합병 등의 의사결정이 중요한데 이때 총수의 역할이 절대적이라는 것이다. 기업 이미지 추락, 해외 투자자 불신 등이 겹쳐 대외적으로 어려움이 가중된다고도 호소한다.
재계 관계자는 “한국 경제 성장 과정에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과감하고 신속하게 투자를 결정했던 총수 경영의 힘이 컸다”며 “‘월급쟁이 사장’인 전문경영인의 책임과 권한으로는 이를 대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돌아보면 기업 성장의 결정적인 장면에 총수의 ‘결단’이 있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1974년 부친의 반대에도 사비를 털어가며 ‘한국반도체’를 인수, ‘반도체 코리아’의 기반을 닦았다.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1992년 영국에서 2차전지 샘플을 직접 가져와 개발을 지시했고, 한 해 2천억원대 적자를 내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LG는 현재 전세계 중대형 배터리 시장을 이끌고 있다.
반면 전문경영인 문화는 빈약한 편이다. 48년간 전문경영인이 이끄는 유한양행은 안정적인 실적을 내고 있지만, R&D 등 미래 투자에 인색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KT와 포스코 등도 전문경영인에 의해 운영되지만 정부와 정치권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외부 눈치를 보느라 경영인과 조직 모두 몸살을 앓고 있다.
이경묵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총수는 전문경영인이 단기 성과주의로 흐르거나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일 때 이를 통제하는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총수가 없어도 전문경영인이 있어서 기업이 당장 휘청거리지는 않겠지만 중요한 의사결정을 못하는 우려가 따른다”며 “특히 4차산업 혁명으로 급변하는 시기에 때를 놓치면 따라잡기 어려워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 “우물 안 개구리 인식…기회 놓치면 치러야 할 비용만 늘어”
‘삼성 저격수’로 불리는 김상조 한성대 무역학과 교수는 이런 주장에 대해 “우리 사회가 가장 먼저 깨치고 나와야 할 낡은 인식”이라고 일축한다.
김 교수는 “글로벌 비즈니스를 하는 기업의 지배구조를 국익과 애국의 관점에서 보는 것은 우물 안 개구리의 시각”이라며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를 놓치면서 지배구조는 취약해지고 헤지펀드의 공격을 유발하는 등 삼성이 치러야 하는 비용은 더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전략적 의사결정이 일정 정도 지연될 수는 있겠지만 삼성이 무너진다는 주장은 잘못됐다”며 “삼성은 우리나라 재벌 중에서 역량이 가장 뛰어나고 계열사별 CEO(최고경영자)의 능력도 어느 그룹보다 낫다”고 말했다.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부 교수는 최근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하는 연구 결과를 발표해 눈길을 끌었다.
전 교수는 2007년 10월∼2009년 12월 삼성 비자금 수사와 이건희 회장의 유죄 판결, 사면 등의 사건이 삼성전자의 재무 성과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본 결과 통계적으로 무관하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밝혔다.
재벌 총수에 대한 사법 처리가 국민경제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은 실증적 근거가 없다는 얘기다.
정치 스캔들보다 ‘제품 스캔들’이 더 치명적이라는 분석도 있다.
시장조사기관 커런트 어낼리시스는 “한국에서 받아들이는 삼성의 이미지와 글로벌 소비자의 반응에는 큰 차이가 있다”며 “제품 문제가 아닌 이상 시장에서 (이 부회장 구속의) 영향력은 미미할 것”이라고 봤다.
LA타임스는 이 부회장의 부재 시 투자 등 결정에 일부 영향이 있겠지만 시장에선 갤럭시노트7 단종, 세탁기 리콜사태 등이 더 어려운 문제라고 진단했다.
이런 제품 문제는 미국 심야 코미디쇼의 소재로 활용되는 등 브랜드 이미지에 훨씬 치명적이라는 것이다. 전문경영인이 총수를 대신할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반론이 만만찮다.
김진방 인하대 경제학과 교수는 총수 부재에 따른 ‘경영 공백’에 대해 “과연 그렇게 긴급한 일들이 있는지 의심이지만, 사실이라면 총수의 결단에 의존해왔다는 게 오히려 문제”라고 꼬집었다.
김 교수는 “전문경영인에게 필요한 권한과 역할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없었던 것”이라며 “전문경영인이 총수의 눈치를 보거나 허가를 구하고 그의 직관적 결정을 따라야 하는 구조가 근본 문제”라고 말했다.
앞으로 총수의 역할이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는 주문도 따른다.
전문경영인을 선임, 감독하는 ‘관리자의 관리자’ 역할에 그치거나, 경영은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문제가 생기면 외부와 소통하는 ‘코디네이터’ 역할로 리더십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