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대학, 시험을 버려라/김기수 캐나다 메모리얼대 교육철학 교수

[시론]대학, 시험을 버려라/김기수 캐나다 메모리얼대 교육철학 교수

입력 2010-02-24 00:00
수정 2010-0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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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설 지방 사립대 H총장은 지금 교수들과 실랑이 중이다. 그는 교수들에게 중간고사건 기말고사건 일절 시험을 뵈지 말라 한다. 그러나 교수들은 선뜻 응하지 않는다. 학생들에게 시험을 뵈지 말라니! 대학도 학교다. 그러니까 여기서도 선생은 가르치고 학생은 배운다. 그러니 교수방법도 개선하고 학생의 필요도 이해하자면 무엇을 얼마나 배웠는지 평가해야 한다. 시험은 그런 평가의 전통적 방법이다. H총장이 돌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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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수 캐나다 메모리얼대 교육철학 교수
김기수 캐나다 메모리얼대 교육철학 교수
H총장은 물론 돌지 않았다. 시험을 뵈지 말라는 거지 학업성취도를 평가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달리 더 좋은 길을 찾으라는 말이다. 그런 게 있을까. 있다면 뭘까. 이 점을 생각해 보면 H총장이 실은 이 시대 고등교육의 큰 문제 하나와 씨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시험이라는 평가방법부터 살펴보자. 학교에서처럼 대학에서도 가르치고 배울 것은 교과서 안에 적혀 있다. 그런데 이제 학문의 길에 들어선 대학생의 교과서는 그의 나이를 감안해서 내용을 가감하지 않는다. 해당 분야의 성과로서 학문을 닦는 데 기초가 되는 것은 모두 망라한다. 교수는 그것을 다 가르치고 학생은 다 배워야 한다. 시험은 그것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또는 정답을 얼마나 댔는지-수치나 등급으로 판정하는 일이다.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수치나 등급의 평가는 끊임없이 잘하는 자와 못하는 자를 구별하여 학문의 길에 적합한 ‘인재’를 가려낸다. 해당 연령의 5%가 대학에 가던 1960년대나 9%가 가던 1970년대까지는 거기서 탈락하더라도 대학생은 일단 ‘엘리트’였으니 사회진출에 큰 지장이 없었다. 그러니 “그까짓 시험 같은 거야.”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해당 연령의 거의 모두가 대학에 가는 고등교육 보편화의 오늘은 사정이 다르다. 배운 것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를 따지는 시험에 무능해서 일류대학에 못 가는 자도 이제 모두 어딘가 대학에 간다. 서울과 지방 구석구석에 들어선 수백, 수천의 대학에 그런 학생이 넘쳐난다.

그런 학생들에게 교과서 내용을 다 가르치고 나서 그것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평가하면 결과가 어떨까. 입시 위주의 정답주의 교육에서 큰 성공을 못 봤던 그들의 점수는 이번에도 좋지 않으리라. 그래서 이제까지처럼 앞으로도 “공부 못한다.”고 거듭거듭 구박당하리라. 강의와 시험 위주의 교육은 그래서 끊임없이 대학생 대다수에게 소외감과 자괴감을 강요하리라.

고등교육이 엘리트 교육이었던 시대의 시험이라는 평가방법이 고등교육 보편화 시대에는 학생에게 성취감도, 만족감도 주지 못한다. 잦은 결석, 과제물의 불이행, 엎어져 자는 일-이런 한심한 일이 지금 대학 교실에서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는 이유가 뭐겠는가. 지금까지 정답을 외우고 대는 피동적인 공부에 시달려 온 학생들이 공부 자체에 흥미를 잃게 되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학생들에게 시험을 뵈지 말라는 H총장의 생각은 뭐겠는가. 엘리트가 되지 못한 절대다수의 학생에게도 절절한 고등교육의 필요는 있다, 학생을 받아들인 우리에게는 그런 교육적 필요를 충족시킬 책임이 있다, 그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게 아니겠는가.

“글로벌”이니 “세계의 중심”이니 하고 차용한 구호만 메아리처럼 외칠 일이 아니다. 정답을 가르치고 외우게 하여 인위적으로 열등생을 양산하던 엘리트주의 교수법과 평가법은 이제 과감히 버려야 한다.

정답이란 문제를 추구하는 이마다 다를 수 있다. 교과서의 정답도 대개 본래는 누군가의 사적 탐구에서 나온 독특한 답에 불과했다. 이제는 학생이 저마다 자기의 필요에 따라 문제를 추구하고 자기 나름의 답을 만들어내게 가르치고 평가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이제까지는 시험에 실패하여 ‘공부 못하는 자’였더라도 대학에서 ‘똑똑하고 유능한 자’로 변신하여 사회에 진출하도록 지도하는 길은 그때 비로소 보일 것이다.
2010-02-24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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