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민 글항아리 대표
인문학 분야도 힐링과 멘토가 대세다. 족집게 과외선생님처럼 독자상담에 여념이 없는 책들이 대폭 늘어났다. 고민을 들어주고 인문 지식으로 같이 길을 찾아보자는 식이다. 이런 책들은 기왕의 지식정보를 짜깁기하거나 자기 식으로 양념해서 다시 틀어주는 재방송 프로그램과 유사하다. 인문학이라 부르기엔 너무 고만고만하고 닭살이 돋으니 손으로 들었다가도 쳐다보기 싫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역사 이래 새로운 것은 없다지만 진지한 읽기 공간에 이런 식의 돌림노래가 판을 치니 어찌 입맛이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요즘은 스타 감성 인문학이 인문학을 대표한다. 인문 베스트 종합 20위에서 절반이 에세이고 자기계발서에 가까운 ‘인문지침서’들이 또 절반이다. 새로운 주제를 탐구했거나 한 분야를 두껍게 다룬 책들은 찾아볼 수 없다. 정말 “설 자리가 없다.” 뭔가 우리 사회의 인문 지평을 넓혀보려는 책들, 한 꺼풀 더 들어가 보려는 책들은 저 뒤에 밀려나 있다. 비싸다고 냉소를 받고 두껍다고 구경거리가 된다. 출판의 문제제기 기능은 거의 마비되어 간다. 집단지성은 사회이슈를 따라 형성됐다가 허물어지기를 반복하면서 그 파고의 틈새를 따라 인문서들이 휩쓸려가는 식으로 명맥이 유지되며, 사회이슈와 관련 없는 인문학 내부의 중요한 문제 제기는 내놓자마자 녹아 사라진다.
인문학이 사람을 우롱하는 시대이니만큼 인문학을 새롭게 정의해야 할 필요도 느낀다. 시중에 나온 진단을 종합하면 유사(類似) 인문학과 진짜 인문학을 가르는 기준으로 “비판정신의 유무”나 “내용의 심도”가 주로 언급되는 듯하다.
그러나 이런 잣대로는 책을 평가하는 행위가 아전인수로 양분화되기 쉽다. 한쪽에서는 “가치 없는 것들”이라며 폄하할 것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뒷방노인 같은 소리를 한다”고 할 것이다.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초심으로 돌아가 출판의 지식생산 기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출판은 지식을 생산해야지 소비해서는 곤란하다. 또한 고담준론의 복권보다는 사소해도 새로운 생활의 발견이 더 중요하다. 어떠한 책이 새로운 정보, 시각, 통찰, 역전을 담고 있느냐가 인문학을 가르는 분수령이 되면 어떨까. 사실 ‘비판’만큼 손쉬운 것도 없고 ‘깊이’만큼 기생적인 것도 없다. 반대 입장에 서면 ‘비판’이 생기고 고전을 등에 업으면 깊이 있다는 ‘착시’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움’은 쉽게 획득할 수 없는 가치다. 주목하기 어려운 걸 주목하고 변화의 소용돌이로 깊숙이 들어가 최초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은 고행의 길일 테다.
나는 우리의 인문학은 물론 여러 분야에서 출판이 이 새로운 지식을 생산해내지 못하거나 그런 일을 매우 등한시하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걸 생산해내지 못하는 사회야말로 뒷방노인이 가득한 사회가 아니겠는가.
2014-02-13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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