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미경의 원형교차로] 세계인의 일상, 한국 문화/한국콘텐츠진흥원 수석연구원

[성미경의 원형교차로] 세계인의 일상, 한국 문화/한국콘텐츠진흥원 수석연구원

입력 2021-09-13 17:34
수정 2021-09-14 01:51
  • 기사 읽어주기
    다시듣기
  • 글씨 크기 조절
  • 댓글
    0

센강변에서 파리의 10대들
케이팝에 맞춰 커버댄스 하고
파리 뒷골목에 케이푸드점 즐비
다양한 층위서 촘촘한 한류

이미지 확대
성미경 한국콘텐츠진흥원 수석연구원
성미경 한국콘텐츠진흥원 수석연구원
일상적인 상황인데 가끔 낯설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7월 여름에 접어들면서 집 앞 정원의 여러 그루 무궁화 나무에서 꽃이 만발하기 시작했다. 평소처럼 지나치기 일쑤인데 여름이 다 지난 며칠 전에는 그 모습이 몹시 생경해 한참을 바라보고 꽃봉오리도 만져 보았다. 생각해 보니 무궁화는 파리뿐만 아니라 내가 가본 프랑스 도시며 시골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꽃이었다. 한국에 있을 때보다 더 자주, 더 크고 풍성한 무궁화를 보곤 한다.

무궁화가 공식 국화인가 아닌가 하는 복잡한 논의는 잠시 잊기로 하자. 어찌 됐든 무궁화는 관습적으로 나라꽃으로 내면화돼 있고 그 이미지는 다양한 공식 문서와 문양으로 사용되고 있으니 말이다. 타국에서 무궁화를 볼 때 곧바로 한국을 떠올리는 나와 같은 사람들도 대다수일 것이다(그렇다고 소위 국뽕으로 귀결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미지 확대
한 나라의 문화가 다른 문화권에 수용되는 것은 마치 집 앞 정원과 프랑스 도시 곳곳에 피어 있는 무궁화같이 터를 잡고 어우러져 피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매우 일상적인 풍경으로 말이다.

얼마 전 센강 옆 작은 공원에 10대 청소년 4~5명이 모여 무언가를 이야기하며 열심히 몸짓을 주고받고 있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니 익숙한 언어의 멜로디가 CD플레이어에서 흘러나왔다. 아이들은 케이팝에 맞춰 댄스 연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30여년 전 친구들과 카세트를 켜고 뉴 키즈 온 더 블록의 노래에 맞춰 몸을 흔들던 나의 10대 시절과 너무나 똑같아서 누가 볼까 봐 혼자 볼이 빨개지며 미소가 번졌다.

글로벌 패션 브랜드인 에이치앤엠(H&M)은 블랙핑크와 컬래버레이션해서 여기 파리에도 매장 한 구석에 별도의 코너를 마련해 놓고 있다. 케이팝 아이돌 특유의 감성이 묻어나는 다양한 의상과 패션 액세서리가 지나가는 파리지앵의 눈길을 잡는다. 한국 아이돌 그룹은 ‘멋짐’의 선두 주자로 인식되고 있었다. 파리에 거주하는 한 한국 학생은 “시크(chic)하고 힙(hip)”하다며 지나가는 또래들로부터 친구가 되고 싶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고 한다.

해외에서 중국·일본·베트남 음식점은 쉽게 볼 수 있고, 먹을 것의 느끼함에 몸서리를 떠는 우리의 속을 달래 주어서 자주 찾게 된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파리 중심가뿐만 아니라 주거 지역 골목에도 한국 음식점이 많이 들어섰다. 야외 테라스에서 식사하기를 즐기는 유럽 특유의 카페 문화에 맞춰 대부분 테라스를 마련해 놓았다. 김치, 불고기 같은 한국 음식을 알고 즐기는 외국인이 많아진 것은 익히 알려진 일이다.

얼마 전 저녁 식사를 하러 한식당에 갔다. 옆자리에 (우리로 치면 단체 회식 같은 분위기인데) 10여명 정도의 서양인이 자리를 잡고 앉아 메뉴판을 보고 있었다. 한국인이나 동양인 없이. 그 익숙한 분위기처럼 더이상 파전에 와인을 즐기는 서양인들만의 테이블이 낯설지 않을 만큼 한국 음식은 대중화되고 있다.

9월 초에는 몽파르나스에서 ‘케이팝 & 케이힙합 파티’가 열리기도 했다. 사실상 프랑스는 7월부터 백신 접종률을 높여 가며 ‘위드 코로나’ 정책을 진행하고 있지만, 아직 대중음악 공연이나 쇼는 활발하지는 못하다. 그럼에도 케이팝 팬들이 모여 떼창을 부르고 한국말 랩의 묘미를 느끼는 것이다. 한국어를 배우는 한 대학생은 레드벨벳을 가장 좋아하고, 넷플릭스에서 한국 드라마를 즐겨 보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머지않아 한국에 어학 연수를 갈 수 있도록 코로나 상황이 호전되길 기대하고 있다.

한국 문화(혹은 한류)의 해외 확산과 현지 수용은 생각보다 다양한 일상의 층위에서 촘촘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곤 한다. 집 앞에 핀 무궁화가 다른 종류의 꽃나무와 어우러져 정원의 풍경을 완성하듯이 말이다.

내가 그저 예쁜 꽃인 줄 알고 지나치다가 어느 날 문득 무궁화임을 깨닫고 우리나라를 떠올리듯, 여기 사람들이 케이팝 한 구절을 흥얼거리다가 ‘아, 내가 지금 부르는 게 한국말로 된 노래구나’ 하고 멈칫 알아채듯 한국 문화가 세계인 삶의 일부분으로 풍경처럼 일상화되기를 바라본다.
2021-09-14 30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close button
많이 본 뉴스
1 / 3
광고삭제
광고삭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