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
국제금융시장에서 합법적인 외환거래를 우회하거나 세금 포탈 내지는 불법적인 자금세탁 등에 디지털 가상자산이 사용되는 문제와 이에 대한 규제 방안의 필요성이 국제적으로 제기되는 상황이었기에 해당 조처는 더욱 관심을 끌었다.
일단 비트코인을 법정 화폐로 채택했다고 하면 기존의 엘살바도르 화폐를 대체하거나 이와 함께 사용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런 개념은 아닌데, 그 이유는 엘살바도르는 이미 2001년 자국 통화 ‘살바도란 콜론’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즉 엘살바도르는 현재 자국 화폐 대신 미국 달러를 사용하고 있다. 흔히 ‘자국 통화의 달러화’(dollorization)라고 부르는 조처인데, 달러를 발행하는 미국이 아닌 다른 국가에서 자신의 독자적인 화폐 대신에 미국 달러를 공식적인 화폐로 사용하는 경우다.
‘자국 통화의 달러화’는 비단 엘살바도르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고, 비슷한 시기인 2000년 에콰도르와 동티모르 등에서도 이뤄졌던 일이다. 미국 달러만 쓰는 것은 아니지만 자국 통화를 포기한 경우로 화폐개혁에 실패한 짐바브웨 같은 사례도 있다. 세계은행 자료에 따르면 2019년 엘살바도르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4200달러 내외이고 에콰도르는 6200달러, 짐바브웨는 1500달러 정도여서 대부분 저소득 국가로 경제 규모가 크지 않은 경우다. 하지만 이러한 공식적인 ‘자국 통화의 달러화’ 이외에도 공식적으로는 자국 통화가 존재해도 실질적인 경제활동에는 미국 달러를 선호해 사실상의 ‘자국 통화 달러화’가 진행된 경우도 많은데, 심지어는 반미(反美) 국가 또는 사회주의권에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자국 통화의 달러화’가 이루어진 핵심에는 대개 무절제한 화폐 발행에 따른 인플레이션으로 해당 국가의 화폐 내지는 중앙은행이 신뢰를 잃어버렸던 상황과 관련이 높다. 즉 ‘자국 통화의 달러화’ 조처가 시행되기 이전에 해당 국가는 대개 높은 인플레이션을 겪고 있었다.
예를 들어 엘살바도르의 평균 소비자 물가상승률은 1980년대 18.5%, 1990년대 10.6%였고, 에콰도르는 1980년대 34%, 1990년대 39%까지 치솟은 상황이었다.
실제로 해당 국가는 2000년대 초반 통화 당국이 스스로 화폐를 발행할 수 없게 된 ‘자국 통화의 달러화’ 이후에는 과거와 같은 지나친 물가 상승은 막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자국 통화를 포기한 이후 10년(2002~2011년) 기준으로 평균 소비자 물가상승률은 엘살바도르 3.58%, 에콰도르 5.27%로 그 이전에 비해 크게 낮아졌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해당 경제가 자국의 사정에 맞는 화폐 발행과 이자율 조정 정책 등을 포기하는 것을 뜻해서 경기가 어려워도 확장적인 통화정책으로 돈을 풀거나 금리를 낮추는 작업을 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결국 통화정책이라는 경제 운영의 중요한 방법을 사실상 포기하는 것이다.
즉 이러한 조처를 수행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물가상승에 시달리거나 화폐가 가치를 잃은 상태인 것이다. 따라서 이미 자국 통화를 포기한 엘살바도르가 비트코인을 또 하나의 법정통화로 채택했다고 놀라운 일은 아니다.
자국 통화를 포기한 국가 가운데는 미국 달러가 아니라 유로, 엔이나 남아공 또는 보츠와나 등 여러 국가의 통화를 함께 사용하는 짐바브웨도 있다. 그리고 그러한 국가에서는 미국 달러뿐만 아니라 금은 같은 귀금속이 사실상 화폐로 사용되는 경우도 흔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엘살바도로가 비트코인을 법정 통화로 채택했다는 사실 자체가 불법 자금 거래, 세금 포탈, 외환거래 우회 등 지금껏 제기된 디지털 가상자산의 문제를 해소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이러한 상황을 계기로 해당 국가에서 자국 통화에 기반한 화폐 시스템이 왜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됐는지를 파악하는 관점에서 무절제한 정책으로 중앙은행과 해당 국가의 통화가 과거에 신뢰를 잃었던 그러한 상황이 우리에게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2021-06-28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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