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
주말과 휴일 몇 군데 둘러보거나 접촉한 서점과 출판사의 반응이 대체로 이러했다. 우려와 기대 속에서 조심스럽게 추이를 관망하는 모습이었다. 책을 사러 온 대다수 사람들이 새 도서정가제로 할인 폭이 과거보다 줄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였는지 책값을 놓고 실랑이를 벌이는 일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새 제도의 안착 여부를 판단하기에는 시간이 좀 더 걸릴 것이다. 그럼에도 ‘공론화의 순기능’은 벌써 나타나고 있다. 어떤 사안이든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면 이해관계의 충돌로 초기엔 매우 혼란스럽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사안이 명료화되고, 관련된 정보와 지식이 빠르게 확산되며, 국민의 관심과 이해의 심화 등을 통해 공적 논의구조가 형성되고 해결책이 모색되곤 한다. 국제통화기금(IMF) 위기가 국민을 경제전문가로 만들었듯이 도서정가제 논의가 바로 그렇다고 본다.
도서정가제는 본질적으로 가치의 충돌에서 기인한다. 공공재인 책을 살려야 한다는 가치와 소비자의 이익도 외면할 수 없다는 가치가 맞부딪친다. 누구든 한쪽 입장에 서서 목소리를 높이기는 쉽다. 한 국책연구원의 주장대로 “시장에 맡겨 버리자”고 외칠 수 있다. 하지만 시장에서 살아남은 거대 출판사 몇 곳이 세상의 모든 책을 다 만드는 구조가 과연 바람직한지는 의문이다. 책과 출판의 생명은 다양성에 있다.
도서정가제는 상반된 가치 사이에서 절충점을 찾으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양측이 용인할 수 있는 가격을 통해 책도 살리고 소비자도 손해가 없도록 하자는 것이다. 물론 보완해야 할 점은 많다. 가장 걱정되는 게 힘 있는 출판사나 유통사들이 법과 제도를 우회해 변칙 할인 마케팅을 펼 가능성이다. 다행스러운 건 법적 기구인 출판유통심의위원회 산하에 출판유통·서점·소비자단체 등으로 구성된 자율도서정가협의회를 둬서 이에 대처토록 한 점이다. 새 정가제의 안착을 위한 논의 구조에 더해 실효성 있는 이행 기구까지 마련되는 셈이다.
새 도서정가제 시행으로 논의의 초점이 공급률로 옮아 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출판사들이 서점에 책을 공급할 때 다 같은 값에 주는 게 아니다. 판매 실적도 좋고 책값도 현금으로 그때그때 잘 갚는 대형서점엔 정가의 50∼60%에 책을 준다. 반면 영세한 동네 서점에는 70%가 넘는 가격에 책을 준다. 책을 아예 안 주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 차이가 좁혀지지 않으면 영세 서점은 살아날 길이 없다는 것인데, 그렇다고 정부가 사인(私人) 간의 거래에 무턱대고 개입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 실로 지난한 문제다.
새 정가제가 모든 문제에 답을 주는 것은 아니다. 가격이라는 폐쇄된 패러다임 밖으로 뛰쳐나와야 한다. 부단한 원가 절감 노력을 통해 양질의 책을 보다 싼 값에 내놓겠다는 각오는 기본이고, 국내 시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전자출판이나 해외시장 개척에도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유통과 서점 쪽도 마찬가지다. 이런 자력구제 노력을 전제로 책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새 도서정가제에 대한 ‘비판적 지지자’가 돼야 한다.
2014-11-25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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