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 폭등·러 보복 공포·전략적 야심에… ‘러 제재’ 美에 반감 커졌다

물가 폭등·러 보복 공포·전략적 야심에… ‘러 제재’ 美에 반감 커졌다

입력 2022-05-02 20:12
수정 2022-05-03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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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동조·중립 국가 왜 늘었나

‘러 침공 규탄’에 140개국 지지에서
유엔인권위 러 퇴출 찬성 93국뿐

亞 “美·러 싸워 피해” 美 지지 이탈
남미 “유럽 문제일 뿐” 독자 노선
“나토 탓 전쟁”… 阿 25국 美에 냉담
브릭스, 美 입김 벗어난 경제 노려

WSJ “제재 부담 韓 등 동맹만 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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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5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에서 러시아군의 우크라이나 민간인 학살 영상이 나왔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부차에서만 300명 넘는 주민이 살해됐다”며 러시아를 국제사회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장준 주유엔 중국대사는 “사건의 정확한 원인부터 검증하자. 근거 없는 비난을 자제하라”고 반박했고,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도 같은 달 11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의 화상 회담에서 ‘부차 학살에 대해 독립적인 조사’를 강조하며 러시아를 감쌌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천인공노할 만행에도 아시아와 중남미, 아프리카의 상당수 국가들이 중립적인 태도를 지키고 있다. 왜 이들은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의 ‘공조’ 요구를 뿌리치고 사실상 모스크바를 지지하거나 동조하는 것일까. 경제적 동기나 이념, 전략적 야심, 러시아에 대한 두려움 등 다양한 이유가 복합적으로 존재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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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현지시간) 워싱턴포스트 등에 따르면 현재 러시아에 가장 크게 힘을 실어 주는 나라는 브릭스(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프리카공화국)다. 이들은 과거부터 ‘미국에 휘둘리지 않는 경제·외교 블록’ 구축을 목표로 삼아 왔고, ‘미국 이후의 시대’는 자신들이 이끌겠다는 야심도 있다. 중국 관세 당국인 해관총서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중러 교역량은 381억 8000만 달러(약 47조원)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견줘 30% 가까이 늘었다. 서구세계의 대러 제재가 본격화한 3월에도 전년 동월 대비 13% 성장했다. 인도의 ‘러시아 구하기’ 노력도 상당하다. CNBC방송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 원유를 싸게 구매해 재미를 본 인도가 이제 석탄 수입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브라질과 남아공 역시 러시아에 대한 제재나 비난을 거부해 푸틴 대통령에게 숨통을 틔워 줬다.

3월 초 러시아 침공을 규탄하는 유엔 결의안 표결 때만 해도 193개 회원국 가운데 140개국 넘는 국가가 지지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한 달 뒤인 지난달 7일 러시아를 유엔인권위원회에서 퇴출시키는 투표에선 찬성국이 93개국으로 줄었다. 회원국 절반 이상이 반대표를 던지거나 기권·불참했다. 러시아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아시아의 ‘집단 이탈’이 눈에 띄었다. 푸틴 대통령이 보복에 나설 수 있다는 두려움과 대러 제재 본격화로 인한 식량 및 에너지 가격 폭등에 대한 불만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아시아 국가 가운데 러시아 인권위 퇴출에 찬성한 나라는 한국과 일본, 미얀마, 이스라엘 정도에 불과했다. 유럽연합(EU)의 한 외교관은 이코노미스트에 “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 두 마리의 코끼리가 싸우면 다치는 건 (코끼리가 아닌) 주변의 작은 동물들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도 나쁘지만 개발도상국의 어려움을 무시하고 러시아 제재를 단행한 서구국가들도 문제라는 비난이 나온다”고 전했다.

제3세계의 구조적 빈곤이 미국의 착취에서 비롯됐다는 ‘종속이론’의 태동지 남미에서도 워싱턴에 대한 항의가 커지고 있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유럽 내부 문제’인 우크라이나 전쟁을 ‘인류 공동의 과제’인 양 과대 포장한다는 시각이다. 다른 나라 주권 침해를 일삼는 미국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비난하고 제재하는 건 전형적인 ‘내로남불’이라는 인식도 있다. 미 싱크탱크 ‘국제위기그룹’(ICG)의 리처드 고완은 “코로나19 백신을 독식한 선진국의 이기적 행동을 지켜본 저개발국들 사이에서 ‘더이상 서구세계에 끌려다니지 않겠다’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20세기 비동맹운동과 비슷한 흐름”이라고 설명했다.

아프리카에서는 뜻밖에도 러시아에 대한 동정론이 대두된다. 과거부터 ‘정의의 편’은 미국이 아닌 러시아라는 생각이다. 냉전 시절 아프리카에는 워싱턴의 지원을 받아 정권을 유지하던 독재자들이 많았는데, 이들에게 맞서 싸우던 게릴라에게 무기와 자금을 제공한 나라가 소련이었다. 서구 제국주의의 최대 피해자인 아프리카 국가들은 지금도 미국이나 유럽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인권이나 민주주의 등 ‘보편적 가치’의 이면에 자신의 잇속을 채우려는 속셈이 있다고 여긴다. 이번 전쟁의 근본 원인도 수십년간 이어진 러시아의 경고를 무시하고 무리하게 동진(東進)을 감행한 나토와 우크라이나에 있다고 본다. 이런 이유로 아프리카 54개국 가운데 절반가량인 25개국이 3월 초 유엔 결의안에 기권하거나 불참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여러 가지 이유로) 대러 제재 부담을 나토 국가와 한국, 일본, 호주 등 미국의 동맹들만 나눠 지게 됐다”며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되면 서방세계는 전 세계 대다수 ‘방관자’를 어떻게 끌어들여야 할지 고민하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2022-05-03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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