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40주년…신작 ‘시선’ 선보여
1960년대 중반 신필름에 들어가 신상옥 감독 밑에서 일했다.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일하다 1974년이 되어서야 장편 데뷔작을 찍었다. 국도극장에서 단관 개봉한 이 영화는 105일 만에 46만 명의 관객을 모았다. 처음으로 30만 관객을 넘었던 ‘미워도 다시 한 번’(1967)을 뛰어넘는 엄청난 기록이었다. 자고 일어났다가 스타가 된 주인공은 이장호 감독이고, 화제를 일으킨 영화는 신성일·안인숙 주연의 ‘별들의 고향’이다.데뷔한 지 40주년이 된 이장호 감독이 신작 ‘시선’을 들고 다시 영화계로 복귀했다. ‘천재선언’(1995) 이후 19년 만이다. ‘별들의 고향’을 비롯해 ‘바보 선언’(1983), ‘바람 불어 좋은 날’(1980) 등 최근 한국영상자료원이 발표한 한국영화 100선 중 ‘톱 10’에 3편이나 올릴 정도로 이장호는 1970~80년대를 대표하는 감독이었다.
그러나 인생사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듯, 이장호 감독은 “지난 27년 동안 내리 내리막길을 걸었다”고 했다. 영화의 개봉을 앞두고 지난 4일 서울 충무로 시네마서비스에서 가진 인터뷰 자리에서다. 영화는 오는 17일 개봉한다.
”’별들의 고향’이 4월에 개봉했어요. ‘시선’도 4월에 개봉하는군요. 그동안 영화를 만들고 싶었는데, 잘 안됐어요. ‘공포의 외인구단’ 이후 만들거나 제작한 영화들이 다 흥행이 되지 않았죠. 연출을 하려고 해도 기회가 없었습니다. 오랫동안 영화 연출에 대해 갈증을 느꼈었죠. 이렇게 영화를 완성하고 관객에게 선보이는 게 너무나 기쁜데 한편으로는 어리둥절하기도 해요.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어요.”
’시선’은 이장호 감독이 만든 20번째 영화다. 그는 “내 인생의 내리막길은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한 하나의 훈련이었다고 생각한다. 필연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말했다.
’시선’은 이슬람 국가로 선교를 떠난 기독교 선교단이 무장단체에 납치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순교와 배교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간의 약한 마음을 섬세하게 그렸다. 엔도 슈사쿠의 장편 소설 ‘침묵’을 모티브로 했다.
영화는 캄보디아에서 촬영됐다. 날씨가 좋지 않았던 걸 빼면 어려운 점이 별로 없었다. “코닥 필름 3만 자를 쓰는 게 소원이었던” 1970년대와 비교하면 “지금은 디지털을 이용해 무제한으로 촬영”할 수 있었다.
”동시 녹음에, 필름 걱정 안 하죠, 모니터로 찍은 거 바로 확인할 수 있죠, 이런 천국 같은 곳에서 영화 엉터리로 찍으려고 해도 엉터리로 못 찍겠구나 생각했어요. 매우 좋아진 촬영시스템 때문에 만족스러운 촬영이었습니다.”
19년 만의 현장 경험이었지만, 그는 금세 촬영에 몰입할 수 있었다. 그는 어차피 정교하게 스토리보드를 만들어가는 스타일의 감독은 아니다. 요즘으로 치면 홍상수 감독처럼 현장에서 모든 걸 만들어간다.
”신상옥 감독님은 언제나 현장 연출이었어요. 우리 때는 늘 그랬어요. 감독이 바라는 대로 현장은 이뤄지지 않습니다. 콘티를 세밀하게 짜와도 별 소용이 없어요. 감독이 ‘이렇게 찍어야지’라고 고집을 피울수록 현장에서 발생하는 예상치 못한 일 때문에 더욱 당황하게 돼요. 저희는 현장에서 임기응변하는 걸 많이 배워서 그런지 어떤 일이 발생해도 전혀 당황하지 않게 됐어요. 신기하게도 영화를 찍으니 제 몸이 그런 걸 기억하고 있더라고요. 영화 찍기가 체질화됐던 거죠.”
그는 40년 넘게 영화계에서 일하며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을 만들었다. 1970년대 쓸쓸한 시대의 공기를 담은 ‘별들의 고향’, 리얼리즘 계열의 ‘바람불어 좋은 날’, 에로영화 ‘무릎과 무릎사이’(1984), 만화를 소재로 한 ‘공포의 외인구단’(1986) 등 다양하다. 그는 “권태감 때문에 다양한 영화에 도전했다”고 했다.
”저는 한 번 갔던 길은 잘 가지 않는 습성이 있어요. 어제 갔던 골목을 가지 않고, 오늘은 새로운 길을 찾아서 걷죠. 그러면서 여러 가지를 느껴요. 아이들이 놀던 골목의 흔적, 집에서 흘러나오는 된장찌개 냄새, 그런 새로운 걸 즐길 줄 알았던 것 같아요.”
50년 가까이 영화계에 몸담았지만, 그는 여전한 현역이고, “노인의 힘을 보여주겠다”는 각오도 남다르다. 베트남 보트피플을 구해준 한 선장의 이야기를 담은 ‘96.5’라는 신작도 준비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꿈’ 같은 동심 어린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고 한다.
”어린 시절, 동네에 유리조각들이 많았어요. 빨간 유리를 통해서 보면 빨간 세상, 파란 유리를 통해서 보면 파란 세상이었죠. 아버지가 영화 검열관이어서 아버지 무릎에 앉아서 영화를 보며 많이 물어봤던 것 같아요. 그런 추억들이 제 성장에 기초가 됐죠. 그런 동심에서 뭔가 얻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그 동심을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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