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인권과 염승식
가수 전인권과 밴드 게이트플라워즈의 염승식이 3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를 하기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연합뉴스
하숙집으로 올라가는 언덕길에서 테이프를 플레이어에 넣는 순간, 찌릿한 게 느껴졌다. 오지 오스본, 너바나 등 ‘양음악’에만 심취한 그에게 ‘가요인데 가요스럽지 않은’ 기타와 드럼 비트는 신선함을 넘어 감동이었다.
밴드 게이트플라워즈 기타리스트 염승식(33) 이야기다.
2002년 귀국한 염승식은 2004년 전인권(60)의 솔로 앨범 ‘전인권과 안 싸우는 사람들’이 출시되자 냉큼 샀다. 또 친구와 막걸리 한 병을 나눠 마시고는 대학로에서 열린 전인권의 공연도 보러 갔다.
그가 공연 도중 객석에서 용기 내 전인권에게 물었다.
”언제쯤 일어나면 되나요?”
”아직은 아니다. 좀 있다 얘기해주마.”(전인권)
공연 후반 전인권은 객석의 염승식과 눈을 마주치며 손가락으로 가리키고는 “지금 일어나라”고 했다.
이게 전인권과의 첫 대화였다.
그리고 딱 10년이 흘러 두 사람은 최근 종로구 삼청동에서 팬과 가수가 아닌, ‘뮤지션’ 대 ‘뮤지션’으로 긴 대화를 나눴다. 염승식이 전인권밴드로 앨범 ‘2막 1장’을 낸 전인권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난 9월27일(음력 9월4일) 환갑을 맞은 전인권과 무려 27년 나이 차인 염승식은 “형님”, “승식아”라고 친근하게 부르며 죽이 척척 맞았다. 다음은 일문일답.
-- 형님과의 첫 대화는 10년 전이었네요. 2005년에는 형님 자서전도 샀고 자택이 있는 삼청동에도 자주 놀러왔죠. 그래서 지난봄 음악 페스티벌 ‘그린 플러그드’에서 형님과의 협연은 감개무량했습니다.(염승식, 이하 염)
▲ 같이 공연하면서 ‘승식이가 록을 제대로 하는구나’라고 느꼈지. 3년 전 KBS 2TV ‘톱밴드’에서 게이트플라워즈를 눈여겨봤지만, 실제 연주를 보니 마치 블랙 사바스의 기타리스트 토니 아이오미처럼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더라고.(전인권, 이하 전)
-- 제가 블랙 사바스를 엄청 좋아해서 몸 둘 바를…. 하하. 지난해 ‘펜타포트 록페스티벌’에서 들국화 무대를 보며 ‘템포가 느리면 리듬감이 떨어진다’는 제 고정관념이 깨졌는데요. 템포 있는 곡이 아닌데도 형님은 오른손으로 무릎을 치며 노래하시던데 박자를 엄청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 같았습니다.(염)
▲ 난 외국곡을 카피해볼 때도 리듬 폭을 최대한 넓히는데 이런 연습은 밴드에게 굉장히 중요하지. ‘쿵딱 쿵쿵따닥’ 등 리듬에도 모양이 있거든. 밴드에서 정확한 비트를 살리는 건 드럼인데 이번 전인권밴드 앨범에선 (드러머) 신석철이 그걸 잘 받쳐줬어.(전)
-- 신석철 선배님은 이번 앨범에서 전곡의 기타 연주도 하셨는데요. 또 전인권밴드에는 기량이 대단한 분들이 모였습니다.(염)
▲ 석철이가 드럼 잘 치는 건 알았지만 유튜브에서 기타 치는 영상을 보고서 전주부터 반했어. 지미 헨드릭스가 사이키델릭한 연주를 하지만 석철이는 광란 기타가 아니라 사람 몸살 나게 하는 절제력을 갖고 있더라고. 베이시스트 민재현은 21살 때 보자마자 ‘넌 당장 일본의 안전지대 들어가도 베이스 끝내주게 치겠다’고 했던 친구야. 정말 힘이 된 건 드럼과 베이스지.(전)
-- 드럼과 베이스를 근간으로 한 비트의 중요성을 고집하셔선지 형님 앨범은 안정적이면서도 파워풀합니다. 들국화가 가진 리듬을 캐치하고 싶은 적도 많았거든요. 그 핵심적인 리듬을 후배 뮤지션이 많이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저희 또래들은 빠르게 달리려고만 하는데 감동이 별로일 때도 있거든요.(염)
▲ 허허. 승식이가 ‘신나게’ 똑똑하네. 나도 이번에 노래할 때 이 친구들의 훌륭한 드럼과 베이스에 피해가 가지 않으려고 노력했지. 팀워크를 통해 이렇게 조화를 이루는 게 음악의 재미인 것 같아. 요즘도 이번 앨범을 듣는데 이렇게 오래 내 음악을 들은 적이 없었던 것 같아.(전)
-- 세상을 떠나신지 1주기가 다가오는 들국화의 드러머 주찬권 선배님도 대단한 연주자셨죠. 들국화도 당시 록그룹과 사운드가 달랐습니다.(염)
▲ 주찬권은 머리가 좋았어. 곡을 빠르게 이해하고 한방에 다 끝냈으니까. 엔지니어가 놀랄 정도였지. 당시 제작자들은 투자한 돈을 빨리 뽑아내려 급하게 녹음하는 관행이 있었는데 우린 찬권이 덕에 14프로(약 50시간)만에 전 앨범을 다 녹음했으니까.(전)
염승식은 인터뷰 전날까지 전인권밴드 앨범을 수차례 반복해 들었다고 했다. 들국화 앨범의 연장선이라고 여겼지만 록을 근간으로 포크, 블루스 등으로 스펙트럼이 한층 넓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특히 “형님의 보컬이 전성기 시절을 능가하는 것 같다”며 “훨씬 더 자유로우면서도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목소리”라고 감탄했다. 그러자 전인권은 “난 너희 음악도 좋다. 보컬 (박)근홍이를 보니 (김)현식이 같은 소리가 나오더라”고 칭찬했다.
-- 이번 앨범에서 형님이 8곡을 작곡하고 정원영 선배님이 3곡을 만드셨더라고요. 어떤 방식으로 작업하셨나요.(염)
▲ 합주로 녹음했는데 구성원 각자가 자기 파트를 완벽하게 해냈어. 난 곡을 만들고 노래 연습도 확실하게 해갔지. 정원영은 녹음실에서 ‘형 이거 만들었어요’라고 줬고 난 3일 만에 가사를 써서 노래도 한 방에 끝냈어. 모두 그전에 기초를 쌓고 계속 연습해서 한 번에 죽 부르고 몇 군데만 고쳐 완성했지. 정말 편하게 작업했어.(전)
-- 2004년 ‘걱정말아요 그대’를 듣는데 마치 제게 해주시는 말씀 같았어요. 이번 앨범에서도 형님이 11곡 전곡의 가사를 쓰셨는데 인생을 돌아보듯 관조적인 노랫말에서 공감의 폭이 컸습니다.(염)
▲ 내가 과거에 사고를 좀 많이 쳤으니까. 허허. ‘내가 왜 서울을’, ‘들리는지’, ‘오늘’ 등 지난 시간의 아픔을 통해 세상과 화해하고 서로 이해하자는 마음을 담은 거지. ‘내가 왜 서울을’에는 록 하는 사람들에 대한 편견, 우리의 입장을 얘기하고 싶었어. 마지막 부분 ‘그 모든 아픔을 그 누가 담겠어요’란 가사는 아픔과 스스로 화해해 자기 안에 담자는거지.(전)
-- 들국화도 인디에서 출발해 주류 시장에서 폭발력을 가졌는데요. 여전히 저희 같은 밴드들이 록 음악을 하는 건 녹록지 않습니다. 게이트플라워즈도 음악적으로 정립할 부분이 있고 우리를 더 많이 알려야 하는 숙제가 있거든요.(염)
▲ 정립이란 게 정말 중요한 얘기야. (블루스 뮤지션인) 블라인드 윌리 존슨, 리드 벨리 같은 뮤지션들이 본질부터 파고들어가는 음악으로 정립해 놓은 게 있듯이. 밴드는 리듬의 정립이 잘 돼야 하는데 그럴 때 중요한 건 비트지. 비트의 정확도를 갖고 가면 박자 감이 좋아져 크게 동요되지 않고 매 무대 승리하며 연주할 수 있거든.(전)
-- 결국 밴드에게 기본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형님은 음악적으로 대단한 역할 모델입니다. 안전하게 가고 싶어하는 후배들에게 ‘할 수 있다’고 계속 도전하게 해주시니까요.(염)
▲ 밴드는 애환이 있어. 힘들지. 자기 세계 안에서 스트레스가 엄청나거든. 그래도 도전은 계속 해야지. 우리 밴드도 추운 모스크바에 가서 꽁꽁 싸매고서 ‘내가 왜 서울을’을 한번 불러보고 싶어. 우리 시대에는 밴드 연주자를 등한시하고 록을 한다면 비주류로 쳤지. 하지만 비주류의 시선이 더 정확할 수도 있어. 록 하는 친구들에게 말하고 싶은 건 옳은 것을 강력하게 말하자는 거야. 우리 록 시장도 점점 좋아지고 있고 록은 발전할 수밖에 없거든.(전)
-- 산타나가 과거 ‘슈퍼 내추럴’ 앨범에서 젊은 뮤지션과 콜라보레이션(협업)을 했는데, 형님도 지난해 원더걸스의 예은 씨와 ‘펜타포트 록페스티벌’에서 협연해 의외였는데요.(염)
▲ 예은이가 같이 해보고 싶다고 연락이 왔어. 처음엔 폼 나게 남자끼리 협연하고 싶었지. 예은이가 대학로 클럽에 연습하러 왔는데 우리 노래가 본인 음높이와 안 맞는데도 ‘걱정 마시라’며 저음으로 튀지 않게 노래하는 거야. 연습 방식이 빠르고 철저했어. 예은이의 이번 솔로 앨범도 결국 록이야. 정말 잘 만들었지.(전)
-- 요즘에는 어떤 뮤지션의 음악을 들으시나요.(염)
▲ 아침에 일어나 록 비트를 내 몸으로 타는 연습은 꾸준히 해. 최근에는 피아니스트 백건우 씨의 음악을 많이 들었는데 소리가 오버 없이 무척 견고해. (영국 밴드) 킹 크림슨 앨범도 듣는데 이들은 차 지나가는 소리도 리듬·음악으로 듣는 사람들이지.(전)
-- 백건우와 킹 크림슨은 갭이 너무 큰데요? 하하. 후배들에게 조언을 해주신다면.(염)
▲ 과거 (한국무용가) 이매방 선생과 제주에서 같이 공연한 적이 있는데 사람들이 ‘이 친구가 전인권’이라고 소개하자 그분이 ‘난, 나밖에 몰러~’라고 하시더라고. 그 말씀이 진짜 멋있고 충격적이었어. (국악 기반 퓨전 밴드) 잠비나이 같은 팀도 정말 좋던데, 모두 자기만의 것을 갖고 있으니 그걸 잘 살려야 해. 그래서 대중음악은 어렵지.(전)
전인권밴드는 현재 ‘2막 1장’이란 타이틀로 투어를 펼치고 있다. 오는 11~12일 용산구 한남동 블루스퀘어 공연이 남아있다.
전인권은 “사실 지난달 대구 공연 때 객석이 다 차진 않았는데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며 “음악적으로는 요즘처럼 희망적인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난 앞으로 20년을 본다. 10년 더 음악하고 10년은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말하자 염승식이 손사래를 쳤다.
”(블루스의 거장) 비비킹처럼 80세가 넘어도 음악하셔야죠.”(염)
”승식이가 얼마 전 밤 11시에 술 마시고서 ‘좋아한다’고 문자 했을 때 정말 기분이 좋았어. 허허. 그리고 해마다 명절이면 갈비, 버섯 이런 거 보내주는 것도 너무 감동이야. 응원해주는 만큼 노력해볼게.”(전)
연합뉴스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