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 만드는 사람/설혜심 지음/휴머니스트/432쪽/2만 5000원
제작자마다 다르게 국토 표현‘모국’ ‘아버지의 땅’ 단어 접목
국가 향한 ‘충성의 감정’ 유도
제바스티안 뮌스터가 1588년에 제작한 여성화된 유럽 지도. 유럽 대륙을 여성의 몸으로 파악하는 경향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휴머니스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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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는 ‘국민’의 개념 확립에도 영향을 미쳤다. ‘지도 만드는 사람’은 국민국가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지도의 의미를 근대 초 영국의 사례를 들어 분석한 책이다. 지도가 국민 정체성 확립의 길잡이 노릇을 했다는 독특한 주장을 담았다.
전공인 영국사를 중심으로 역사지지서를 복원하려던 저자는 부활의 시점이 영국에서 국민국가가 탄생한 시기와 일치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유럽에서 인본주의를 받아들인 영국은 자신의 역사를 새로 써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 과정에서 국토에 대한 구체적인 개념도 만들었다. 지도 제작 사업은 국가나 국민의 정체성에 이바지하게 됐고, 지리교육은 이데올로기 학습의 성격을 띠게 됐다.
현실이 지도를 모방하기도 한다. 16세기 절대군주 헨리 8세의 신하였던 존 릴런드는 영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답사기와 지도를 남겼다. 영국이란 공간을 역사라는 시간의 흐름과 처음으로 접목한 것이다. 지배 왕조는 이를 국민통합 도구로 활용했다. 지도와 지지서 편찬이 국기, 국가, 국어 등에 못지않게 국민을 문화적으로 통합하는 요소로 기능했다는 뜻이다.
관념화된 공간은 지리적이거나 물리적이기보다 어떤 감정적인 것이 돼 국토에 대한 정서적 감정이 배양될 수 있게 만든다. ‘모국’, ‘아버지의 땅’과 같은 단어들이 국토에 접목되는 것이다. 이제 국토에 대한 침범은 자신이나 가족에 대한 침해와 동일시된다. 동시에 국가는 충성의 감정을 유도할 수 있게 된다.
블라우가 1635년에 제작한 ‘새 아틀라스’ 속 유럽 지도. 지도 위에 유럽의 도시를 그리고 양쪽 가장자리에 각 도시를 표상하는 남녀 한 쌍을 넣었다. 다만 이탈리아 베네치아(왼쪽 아래)만 남자 두명으로 표시됐다. 이는 베네치아가 남색의 도시란 걸 암시한 것인데, 이렇게 형성된 지리적 관념은 큰 파급력과 지속성을 띠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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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08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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