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선 무엇을 하든 캔버스가 된다
경북 경주를 소개하면서 유명 관광지 이외의 곳을 여행 목적지로 권하는 것은 다소 부담이 따릅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우리 역사와 만날 수 있는, 내 나라 안에서 첫손 꼽히는 관광지 중 하나가 경주이기 때문입니다. 세월의 무게에 더해 빼어난 아름다움까지 갖춘 유적들을 둘러보기에도 하루 해가 짧은데, 다른 곳까지 찾을 여유를 갖기란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차로 한 시간만 나가면 검푸른 동해바다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지요. 마음은 급해지고 발걸음은 그만큼 빨라지게 될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권해 봅니다. 낮 동안은 경주의 역사와 함께하고, 해거름이거나 이른 시간에 트레킹 삼아 잠시 이곳을 둘러보라고요. 장담컨대 손해볼 일 전혀 없습니다. 사진을 찍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혹은 막연히 그냥 걸어도 좋겠습니다. 당신이 무엇을 하든 그곳은 배경이 되고, 캔버스가 되고, 한적한 산책길이 되니까요. 경주 암곡동 대단위목장입니다. 이름 참 촌스럽죠? 그런데 풍경만큼은 이름과 정말 다릅니다. 산자락 여기저기를 잇는 구릉 위로 너른 호밀밭이 끝간 데 없이 펼쳐져 있습니다. 산 정상에 초록의 바다가 펼쳐져 있는 듯합니다. 간간이 핀 야생화들은 운치를 더해주는 데 모자람이 없습니다.‘구름에 달 가듯’ 언덕 너머 호밀밭길을 자분자분 걷고 싶지 않은가. 바람 불어 호밀들이 일렁일 때면 꼭 초록빛 바다를 유영하는 느낌이다. 가을엔 이 너른 구릉 전체가 붉은 수수밭으로 또한번 변신한다.
호밀밭은 낯설다. 장년층이라면 어린 시절 몰래 밀밭에 들어가 덜 여문 밀을 불에 구워 먹던, 이른바 ‘밀 서리’의 기억은 있겠으나, 호밀밭에 관한 기억은 쉬 떠오르지 않는다.
기껏해야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1951)을 읽은 기억쯤 있을까. 아무래도 우리가 즐겨 먹는 곡물이 아닌 탓일 게다. 밀은 밀이되, 앞에 오랑캐 호(胡)자를 붙인 것도 그런 까닭으로 보면 맞을 듯하다.
예전과 달리 요즘엔 호밀밭이 느는 추세다. 얼핏 보리밭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호밀밭인 경우가 적지 않다. 호밀은 자체로 농산물이 되기보다 주로 소의 먹이, 혹은 자운영처럼 지력(地力)을 높이기 위한 천연 비료 등의 목적으로 쓰인다. 호밀밭 조성 여부야 어찌됐건, 보기 드문 풍광을 펼쳐내는 건 분명하다.
대단위목장을 찾아 가는 길은 벚나무 터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문단지 안에 조성된 것보다 한결 굵어 보이는 벚나무들이 깊은 음영을 만들고 있다. 초봄 벚꽃으로 즐거움을 준 나무들이 이젠 시원한 그늘로 또 한번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셈이다.
정말 너른 호밀밭은 여기서 야트막한 고갯길을 지나야 나온다. 고갯마루 아래 산사면 이쪽저쪽이 온통 호밀밭이다. 대단위목장을 임대 운영하고 있는 김승태씨는 총 면적이 약 1300만㎡에 달한다고 했다.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건축면적 5만 9747㎡) 220개가량의 면적이 호밀밭인 셈이다. 그 너른 공간을 차지한 호밀이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이리저리 파도처럼 일렁인다. 더도 덜도 아닌, 딱 초록빛 바다다.
●TV 드라마, 영화 등 단골 촬영지
막간에 질문 하나. 찔레꽃은 어떤 빛깔을 하고 있을까. 트로트 가요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고향~’을 떠올린다면, 가차없이 ‘땡~’이다. 찔레꽃은 미색이다. 대단위목장을 둘러보는 동안 자주 눈에 띄었던 꽃이기도 하다. 늘 곁에서 보던 꽃도 이런 범상치 않은 장소에서는 마치 고산지대에 서식하는 희귀 야생화처럼 보인다.
호밀밭 사이로 작은 길들이 성긴 그물처럼 이어져 있다. 김씨에 따르면 목장 내 소로의 전체 길이는 ‘10리’(4㎞)를 넘어선다. ‘발병’ 나기 딱 좋은 거리다. 어른 가슴 언저리까지 웃자란 호밀밭 사잇길을 걷다 보면,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듯한 느낌 마저 든다.
이 너른 호밀밭에서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TV 드라마 ‘선덕여왕’ 등이 촬영됐다. 최근엔 KBS 전쟁드라마 ‘전우’의 촬영지로 쓰이기도 했다. 대부분 장쾌한 스케일의 전투신을 찍은 것이 공통점. 목장 내 폐건물 곳곳에 ‘US ARMY’ 등의 글귀가 적혀 있는 것도 영화 촬영 때문이었다는 게 김씨의 설명이다.
●가을엔 농염한 붉은 수수밭으로
볼을 간질일 정도의 바람이라도 불면 호밀이 서로 부대끼며 사르락, 사르락 소리를 낸다. 어디선가 들었던, 친숙한 소리다. 어머니 밥 지을 때 쌀 씻던 조리 소리와 닮았다. 어머니 손 안에서 빙빙 도는 조리에 쌀들이 부딪치며 내던, 바로 그 소리다. 호밀밭 사이를 거닐 때 유난히 포근한 느낌이 들었던 것도 그 때문일 터다.
하지만 이 호밀밭의 절반가량은 머지않아 사라질 운명이다. 대단위목장의 소유주인 한 건설회사에서 이곳에 골프장을 조성할 예정이기 때문. 원래 지난해 골프장이 들어설 계획이었으나 일정이 늦춰지고 있다.
대체로 7월이 가기 전에 호밀은 모두 베어진다. 그 자리에 다른 농작물을 심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단위목장 측은 호밀이 사라진 자리에 수수를 심을 예정이라고 했다. 여름 내내 초록 바다를 이루다 가을에는 붉게 익은 수수로 또 한번 장관을 이룰 터다. 붉은 수수밭이라. 어딘가 여름보다 뜨거운, 농염한 장면이 연상되지 않는가.
글 사진 경주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여행수첩(지역번호 054)
→가는 길 찾아가는 길이 다소 복잡하다. 경주 보문단지 대형 물레방아를 기점 삼아 200m쯤 지나면 삼거리다. 여기서 암곡 방향으로 좌회전한 뒤 3.5㎞ 직진하면 암곡면, 다시 1.5㎞ 더 가면 무장사지 주차장이다. 트레킹을 원할 경우 이곳에 주차한다. 차로 돌아볼 경우 선덕여왕 촬영지 입간판을 보고 좌회전한 뒤 첫 번째 갈라지는 길에서 오른쪽 용문사 방향, 두 번째 갈라지는 길에서는 사슴목장 방면으로 좌회전한다. 대단위목장 정문까지는 2.5㎞가량 된다. 대단위목장 정문 경비초소 직원은 오후 5시에 퇴근한다. 그 이후엔 정문 왼쪽 산길을 따라 올라가야 호밀밭에 닿을 수 있다. 경상북도관광협회 745-0750.
→맛집 경주에 가서 반드시 맛봐야 할 것이 황남빵과 찰보리빵이다. 황남빵은 1939년 처음 선보인 이후 3대에 걸쳐 부드럽고 고풍스러운 맛을 이어가고 있다. 아직도 손저울을 사용하고 팥소를 넣은 둥글납작한 반죽덩어리 위에 빗살무늬 도장을 찍어 멋을 낸다. 749-7000. 황남빵 못지않은 인기를 얻고 있는 명물이 찰보리빵이다. 쫄깃하고 담백한 맛이 일품. 777-0070.
2010-07-01 1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