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햄릿’ 들고 한국 찾은 독일 차세대 연출가 오스터마이어
“실험적으로 봐줘서 고맙다. 그러나 나는 내 작품이 실험적이라 보지 않는다. 오히려 구식 연출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무대나 음악 같은 데 신경쓰기보다 배우들과 더 많이 얘기하는 편이다. 연극이 다른 형식을 많이 빌려 오긴 하지만 그래도 가장 중요한 것은 배우와 드라마다. 무대나 음악 같은 것은 내 개인적 취향이라 보면 된다.” 독일의 스타 연출가로 일찌감치 ‘차세대 대표주자’로 꼽혀온 토마스 오스터마이어(42)가 연극 ‘햄릿’(1일까지 서울 남산예술센터)을 들고 한국을 찾았다.고전을 재해석하는 작업에서 우리나라가 굿이나 마당놀이 같은 전통 문화를 끌어들여 ‘과거와의 접목’을 꾀한다면, 오스터마이어는 영상장치와 록음악 등을 동원해 ‘현재와의 호흡’을 중시한다.
‘햄릿’도 마찬가지. 전·후진을 반복하는 화려한 이동식 무대 위에는 현대적 삶이 펼쳐진다. 햄릿이 VJ 역할을 맡았다. 햄릿이 찍은 영상은 이동식 무대 위로 그대로 투사된다. 독일 표현주의를 연상시키는 그로테스크한 영상이 눈길을 끈다. 배경에 깔린 록음악도 약간 테크노적인 느낌이 섞였다는 점에서 독일 밴드 람슈타인이 연상된다.
철학적인 메시지도 강하다. 핵심은 배우들의 바지에 두껍게 묻어 있는 흙덩이들. 무대 앞에 놓인 흙바닥의 햄릿 아버지 묘는 죽음과 광기의 장소인 반면, 이동무대 위에서는 화려한 현재의 삶과 이성의 세계가 펼쳐진다. 그런데 이 인물들 바지에는 모두 광기와 죽음의 영역에서 지니고 나온 흙덩이들이 더덕더덕 붙어 있다. 광기와 죽음을 다리에 붙이고도 영원하기를 원하는 인간의 욕망과 허망함을 담은 듯 보인다. 지난 29일 오스터마이어와 작품을 두고 얘기를 나눠 봤다.
오스터마이어가 연출한 연극 ‘햄릿’ 장면들.
-고전 재해석은 힘든 작업이다. 언어, 장소, 시간 등의 문제가 있어서다. ‘햄릿’ 같은 경우 일생에 한번은 해야 할 작업이었다. 그래서 다른 연출을 오랫동안 지켜봐 왔다. 그런데 마음에 드는 연출이 없었다. 연출에 일종의 허영심이 투사돼서다. ‘햄릿’은 암흑 같은 상황 속에서 유일하게 떳떳한 1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작품이다. 그러다 보니 연출가가 자신을 그 인물에 투영하더라. 그게 못마땅했다.
→햄릿을 제외한 나머지 배역은 한 배우가 두 역을 동시에 하도록 했다. 돈 아끼려고 그런 건 아닌 듯 싶은데 의도가 있나.
-내 극단에 25명의 배우가 있다. 다들 배역을 따내길 원하는 지라 한 배우가 두 가지 역을 한다고 말하기 쉽진 않다. 더구나 월급은 꼬박꼬박 나가기 때문에 배우들을 많이 쓰지 않는 것은 어떻게 보면 손해이기도 하다. 두 역을 한 배우에게 맡긴 것은 미쳐버린 햄릿이 사람을 구분하지 못해 마구 살인을 저지른다는 점을 참조했다.
→극 중에 배우들이 관객과 소통하는 대목이 있다. 15개국에서 공연했는데 이 부분은 어떻게 처리하나.
-햄릿은 무대 위에 자기 편이라곤 한 명도 없는 인물이다. 오직 관객들만이 햄릿 편을 들어준다. 그래서 넣은 부분이 관객과의 소통 장면이다. 그런데 다들 짧은 영어는 하더라. 사실 언어는 문제되지 않는다. 안 되면 손짓 발짓도 있고….
→TV나 영화 같은 미디어에 연극이 밀린다. 영상시대에 연극의 활로는 무엇인가.
-내 작품에 비디오카메라가 등장하는 게 그저 젊은 층을 유혹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게 지금의 현실이라서다. 작품에 영상을 너무 많이 써서 이제 자제할까도 생각 중이지만….(웃음) 여하튼 지금은 그런 방식이 아니면 연극을 만들 방법이 없다. 내 주변에는 극장 한번 안 가본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연극 하면 옛날식 옷을 입고 문어체 말투를 쏟아내는 거라 생각한다. 극장 관계자들이 연극적 클리셰(판에 박힌 틀)에 물들어 새로운 것을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반성해야 할 대목이다. 새로운 관찰을 통해 새로운 표현법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래도 연극의 장점을 꼽는다면.
-삶 그 자체다. 연극은 매우 위험한 장르다. TV와 영화는 편집과정이 있어 안전하다. 연극은 무대에서 선보이는 찰나의 예술이다. TV와 영화가 2차원적이라면, 연극은 3차원적이다. 눈앞에서 모든 감각을 다 동원해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이 바로 연극의 가치이자 목적이라 본다.
→당신의 작품을 볼 관객들에게 팁을 준다면.
-너무 크게 기대하진 말라는 거다.(웃음) 무대란 결국 엔터테인먼트니까.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2010-10-01 2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