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드’ 개봉… 밀실영화 공포코드 비교
어딘가에 갇혀 버렸다. 이유는 모른다. ‘왜?’라고 질문하기엔 시간이 촉박하다.생사의 기로다. 처절한 몸부림. 방도는 없다. 과연 빠져나갈 수 있을까.
제한된 공간은 다른 요소의 개입을 철저히 배제한다. 도움을 청할 수도, 받을 수도 없다. 의지할 곳은 오직 자신, 혹은 자신과 타인의 관계뿐이다. 영화는 밀실이라는 극한의 상황을 유도한 뒤 그 안에 갇힌 배우들의 반응과 심리를 중계한다. 인간과 사회의 본질을 자연스럽게 훑어 나가는 것. 과학자가 차마 하지 못하는 심리 실험을 감독이 친절히 해 주는 셈이다. 물론 제작비가 덜 든다는 장점도 빼놓을 수 없다.
■ 베리드… 전화해야 산다 vs 폰부스…전화가 끝나야 산다
같은 밀실 영화라도 작품에 따라 영화 문법에는 차이가 있다. 베리드가 ‘6피트 깊이 땅속’, ‘90분 지탱 산소’의 ‘관’을 밀실로 정했다면, 폰부스(2003)는 좀 더 개방적인 밀실을 택한다. 공중전화 박스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진행되는 폰부스는 공중전화로 전화를 건 정체불명 남자와의 사투를 그렸다.
반면 베리드는 소통만이 살길이다. 휴대폰의 배터리가 나갈까 노심초사다. 폰부스와는 반대다. 자신을 매장한 이라크 테러세력과 통화를 해야 한다. 자신이 어디 묻혀 있는지 아는 유일한 사람들인 까닭이다. 같은 밀실을 놓고도 탈출과 소통의 의미를 정반대로 접목한 대표적 예다.
■ 베리드… 현상금 노린 인질극 vs 큐브… 불분명한 실체의 이유없는 감금
그렇다면 이들은 왜 갇혔을까. 베리드는 그 이유를 분명하게 제시한다. 이라크 테러범들이 현상금을 노리고 죄 없는 미국인 노동자를 납치해 묻는다.
반면 영문도 모른 채 정육면체 큐브에 갇힌 사람들의 탈출기를 그린 ‘큐브’(1997)는 명확한 이유가 없다. 큐브를 설계한 이도 함께 갇히게 되는데 그조차 모른다.
그저 언제부터인가 큐브가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책임자가 바뀌어도 프로젝트는 계속 추진됐다고 영화는 말한다. 악은 존재하지만 그 실체가 불분명한, 그래서 책임질 대상이 없는 현대사회의 이면을 꿰뚫는다.
■ 베리드… 개인과 사회 관계 주목 vs 디센트… 극한 직면한 공동체 조명
동굴을 소재로 한 ‘디센트’(2005)는 동굴 안의 인간관계를 주목한다. 6명의 친구들과 동굴 탐사를 떠났다가 고립되는 이야기를 담은 디센트는 극한에 직면한 공동체와 개인의 심리가 어떻게 추락(Descent)하는지 생생하게 보여 준다. 부상당한 친구를 버린 것도 모자라 자신이 살기 위해 괴물이 친구에게 시선을 돌렸으면 하는, 그래서 자신이 도망갈 시간을 벌고 싶은 이기적 본능을 부각시킨다.
■ 베리드… 뻔한 결론 한계로 지적 vs 로프… 미래 내다본 60년 전 혜안
밀실 영화 자체는 이제 더 이상 새롭지 않다. 올해만 하더라도 ‘디센트: Part2’, ‘이그잼’, ‘데블’ 등이 개봉됐다. 하지만 평단의 반응은 싸늘했다.
서스펜스 거장 앨프리드 히치콕의 ‘로프’(1948)가 60년이 지난 지금에도 빛을 발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단지 스릴을 맛보기 위해 대학 친구를 살해한 두 청년이 자축 파티를 열었다가 은사에게 들통 난다는 게 영화 줄거리다. 아파트 거실이란 제한된 공간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롱테이크(편집 없이 길게 촬영) 기법을 사용한다.
이들은 니체의 초인론을 오해하고 강자가 약자를 살육할 수 있다는 소신으로 이 같은 범행을 저지른다. 전후(戰後) 꿈틀거렸던 히틀러 망령에 대한 처절한 반성이 엿보인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절제된 문법도 소름 끼치지만 ‘묻지마 살인’이라는 현대사회 병폐를 일찌감치 짚어낸 혜안이 돋보인다.
6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로프의 센스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아니, 가장 빛난다.
이경원기자 leekw@seoul.co.kr
2010-12-1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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