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철의 영화만화경] ‘아메리칸’

[이용철의 영화만화경] ‘아메리칸’

입력 2010-12-31 00:00
수정 2010-12-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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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옥문 앞에 서있는 비정한 킬러의 일상

잭(조지 클루니)은 스웨덴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행복한 얼굴의 여자 친구 곁에서 그는 왠지 불편한 표정을 짓는다. 이튿날, 바깥으로 나간 잭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다. 곧 총격이 벌어지고, 암살자들을 해치운 잭은 여자 친구마저 죽인다. 로마로 피신한 그는 두목의 지시에 따라 이탈리아 중남부의 작은 마을로 떠난다. 그곳에서 그는 사진작가로 위장한 채 특수한 총을 제조한다. 직업상 주민과 관계를 맺으면 안 되지만, 그는 길에서 마주친 신부와 친분을 나누고, 가끔 들르는 홍등가의 창녀 클라라를 점점 사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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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스릴러의 경우, 첫 총격전 다음엔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아메리칸’은 뜻밖의 전개를 택한다. 주인공은 국경을 넘어 조용한 마을에 안착한다. 지옥에서 탈출해 천국에 도착한 것일까. 기억할 부분은 영화의 오프닝 크레디트다. 잭이 이탈리아 고속도로의 터널을 통과하는 지점에서 때늦은 오프닝 크레디트가 나오는데, 황색 조명과 어두운 터널의 아늑하면서도 불길한 느낌은 이어질 영화에 연옥의 톤을 부여한다. 그러니까 ‘아메리칸’은 연옥에 다다른 남자의 일상에 관한 영화다.

잭은 삶의 여정에 아무런 뜻이 없다고 생각하는 남자다.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주변과 사람들을 대하며, 딱히 두목의 명령이 아니어도 누군가와 친구로 지낼 마음이 없다. 도입부에서 여자 친구의 등을 향해 비정하게 총을 쏜 것도 그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죄 없는 자를 죽인 행위는 원죄와 같아서, ‘아메리칸’은 구원이 필요한 자에게 속죄의 여정을 마련한다. 물론 삶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잭은 자신이 걷는 여정 아래 숨겨진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 그는 잘못된 지점에 불시착한 게 아니라 깨달음의 시간과 드디어 맞닥뜨린 것이다.

신과 구원을 믿는 사람들은 구릉지의 언덕에 마을을 세웠다. 그러나 잭은 자신의 직업에 충실할 뿐, 공간이 베푸는 은혜를 무시한다. 신부가 접근해 선악을 묻고, 창녀와의 만남이 사랑의 감정을 촉발하지만, 자각은 언제나 뒤늦기 마련이다. 믿음을 갈망하는 교회의 종소리가 울릴 동안, 잭은 그 소리에 맞춰 총의 소음기를 제작할 따름이다. 마지막 심판 앞에서 잭은 ‘직업’이란 말로 용서를 구할지도 모른다. ‘아메리칸’은 잭이 만든 총을 건네받은 암살자가 결국 누구를 죽이려 하는지 보여줌으로써 어리석은 자의 삶에 답한다. ‘아메리칸’은 평소 ‘미스터 버터플라이’로 불리던 잭에게 ‘죽음과 변용’을 허락하면서도 구원까지는 약속하지 않는다.

‘아메리칸’은 마틴 부스가 1990년에 쓴 스릴러 ‘매우 은밀한 신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얼마 전 ‘브라이튼 록’으로 감독 데뷔한 영국 작가 로언 조페가 원작을 느슨하게 각색했으며, ‘컨트롤’로 좋은 평가를 얻은 안톤 코르빈이 연출을 맡았다. 원작의 영국인 주인공을 미국인으로 바꾼 ‘아메리칸’은 또 다른 정치적 메시지를 품고 있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 유럽을 떠나 신대륙에 정착한 사람들이 세계의 무기상으로 탈바꿈한 현실을 은유한 ‘아메리칸’은 잭이라는 인물을 ‘돌아온 탕아’의 개념으로 파악한다. 그레이엄 그린의 원작을 각색해 ‘브라이튼 록’을 연출한 조페는, 그린의 ‘조용한 미국인’이 ‘아메리칸’을 형제로 삼길 바란 게 아니었을까 싶다.

영화평론가
2010-12-31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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