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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 고위층 질산암모늄 위험성 알고도 방치… 6년간 경고 묵살”

“레바논 고위층 질산암모늄 위험성 알고도 방치… 6년간 경고 묵살”

이재연 기자
이재연, 안석 기자
입력 2020-08-06 17:50
업데이트 2020-08-06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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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루트 이재민 30만명·150억弗 피해

사망자 135명… 항구직원 가택연금 요청
악취로 화학물질 위험 알고도 조치 안 해
정치인 무능·관료사회 부패에 비난 고조
각국서 구조 인력·구호물자·의료품 지원
분화구처럼 124m 뚫려 버린 베이루트 항구
분화구처럼 124m 뚫려 버린 베이루트 항구 미국의 우주기술업체 맥사테크놀로지스의 인공위성이 촬영한 레바논 베이루트 항구의 폭발 사고 전후 사진. 왼쪽은 사고 전인 지난 6월 9일, 오른쪽은 사고 이튿날인 5일(현지시간)이다. 바다 쪽으로 튀어나온 부두의 창고에 있던 질산암모늄 2750t이 터져 주변 건물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창고 앞 역시 지름 124m에 이르는 분화구가 깊이 파였다. CNN방송은 지중해 연안 3대 미항 가운데 하나였던 베이루트가 이번 사고로 초토화됐다고 전했다.
베이루트 로이터 연합뉴스
레바논 정부가 5일(현지시간) 수도 베이루트의 항구에서 전날 발생한 폭발 대참사의 원인으로 추정되는 질산암모늄의 부실 관리를 규명하는 조사에 착수했다. 6일 오후 현재 사망자는 135명, 부상자는 5000여명으로 늘었으며, 30만명에 이르는 이재민을 도우려는 국제사회의 손길이 이어졌다. 피해 규모가 150억 달러(약 17조원)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마날 압달 사마드 레바논 공보장관은 5일 “군 지도부에 질산암모늄 저장 업무에 관여한 항구 직원 전원의 가택연금을 요청했다”고 말했다. 현지 언론은 강력한 인화 물질이 인구밀집지역 바로 옆 항구의 낡아 빠진 창고에 6년이나 보관돼 왔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뉴욕타임스 등은 현지 관료들의 구조적 부패를 원인 중 하나로 지목했다. 레바논 고위 관료들이 이미 6년 전부터 질산암모늄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주장도 나왔다. 알자지라는 인터넷에 공개된 서류를 근거로 “베이루트 시민들은 몰랐지만, 고위 관료들은 질산암모늄 2750t이 항구 12번 창고에 저장돼 있다는 사실과 위험성을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AFP는 “지난해 항구 주변 악취로 인해 보안 당국이 창고 속 ‘위험한 화학물질’을 알아냈지만 아무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고도 했다.

질산암모늄의 출처는 몰도바 국적 화물선으로 지목됐다. 이 선박은 2013년 9월 모잠비크로 향하던 중 베이루트에 정박했다가 배 소유주 관련 분쟁으로 억류되며 질산암모늄이 하역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현지 세관이 법원에 2014년부터 최소 6차례 공문을 보내 위험성을 경고했지만 묵살됐다는 것이다.

미 조지타운대 파이살 이타니 교수는 “레바논 관료 사회에 부패 및 책임 떠넘기기 문화가 만연해 있다”며 “현지 정치인들은 무능과 공익 경멸로 정의되는 계급”이라고 말했다. 올 들어 80%나 평가절하된 파운드화로 절대 빈곤에 시달리는 주민들은 “레바논을 하루아침에 지옥으로 바꿔 놨다”며 정치인들을 맹비난하고 있다.

미국 우주기술업체 ‘맥사테크놀로지스’의 위성사진에 따르면 폭발 충격으로 인해 바다에 면한 부두의 건물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창고 앞에는 축구장보다 큰 지름 124m짜리 분화구가 생겼다. 이재민들은 임시 개방된 수도원, 미션스쿨에서 밤을 지새우거나 야외에서 지내고, 기부된 생수와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우고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이동한 유엔 평화유지군이 소개 작업을 돕는 가운데 세계 각국에서 보낸 의료진과 수색팀, 구호물자가 속속 도착했다. 유럽연합은 27개 회원국의 소방관 100여명을 비롯해 구호인력·장비를 급파했다. 네덜란드, 체코, 그리스, 폴란드 등도 의료진, 경찰 등 지원인력을 제공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레바논 보건부 장관 요청에 따라 의료품을 공수했고, 세계은행(WB)은 성명에서 “폭발 사고 피해 규모를 평가하고 재건·복구를 위한 공공 민감자금을 동원하겠다”고 밝혔다.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는 세계식량계획(WFP)·적십자사를 통해 130만 달러 상당의 지원을 약속했다.

레바논을 한때 식민지로 뒀던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6일 레바논을 직접 방문해 하산 디아브 총리 등과 지원책을 논의했다.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2세는 “깊은 슬픔”이라며 위로했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5일 밤늦게 레바논을 위한 기도를 집전했다.

적대국들도 인도적 지원을 앞세웠다. 레바논과 적국 관계인 이스라엘 수도 텔아비브는 시청사 외벽을 ‘백향목’ 문양의 레바논 국기로 점등하며 인류애를 강조했다. 레바논의 시아파 무장단체 헤즈볼라를 막후 지원하는 것으로 알려진 이란의 하산 로하니 대통령 역시 “의료 지원을 제공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한편에서는 구호활동을 명분으로 중동 지역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서방 세계나 갈등 국가들의 속내가 반영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2020-08-07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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