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박 ‘친박 2선 후퇴론’ 제기…친박 “이 절이 싫다면 떠나든지” 반발
‘최순실 국정 농단 게이트’가 정국을 뒤흔들면서 이례적인 ‘보수정당 분당(分黨)’이 현실화할 수도 있다는 관측이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다.이번 사태의 여파로 지난 11년간 정치권에서 가장 강력한 계파였던 친박(친박근혜)계가 해체 수순에 들어가고 오랜 세월 암흑기를 걸었던 비박(비박근혜)계의 목소리가 다시 커지자 당내 권력 구도에도 지각 변동이 일면서 헤게모니를 둘러싼 전운이 급격히 고조되고 있어서다.
지난 1995년 거대 여당이었던 민주자유당에서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측근 의원 9명을 데리고 탈당해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했던 것이 ‘분당’에 가까운 탈당이자 비교적 성공적인 사례였지만, 옛 새천년민주당처럼 거의 반으로 쪼개지는 수준의 분당은 보수정당에 없었다.
1997년 신한국당을 탈당한 이인제 전 의원이 만든 국민신당, 2000년 조순·김윤환 전 의원 등을 중심으로 한 민주국민당, 2002년 박근혜 대통령이 만든 한국미래연합 등은 실패 사례였고, 2008년 서청원 의원이 이끈 친박연대는 14석을 얻으며 돌풍을 일으킨 바 있다.
비박계는 박 대통령은 물론 친박계 의원들의 2선 후퇴를 사실상 요구하고 있지만, 친박계는 “우리가 왜 물러나느냐”며 반발하는 형국이다.
성(城)을 내어달라는 점령군과 “최후의 순간까지”를 외치며 저항하는 왕당파 결사대가 맞붙은 모양새와도 비견되고 있어 자칫 둘 중 한쪽이 당을 나가는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비박계가 내놓는 이번 사태의 해법과 권력 핵심부를 향한 비판은 야당 못지않은 수준이다.
비박계는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에서 손을 떼고 상징적 국가원수로만 임기를 채우길 바라고 있다.
또 이번 사태와 관련해 검찰로부터 직접 수사를 받겠다고 자청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박 대통령의 탈당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하나둘 늘어나고 있다.
이와 함께 비박계는 당 지도부 전원 사퇴를 포함해 당을 재창당의 수준으로 탈바꿈함으로써 ‘새집 짓기’에 버금가는 ‘리모델링’을 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당명과 로고 교체, 천막 당사, 삼보일배 등의 요구도 나오기 시작했다.
한 비박계 인사는 3일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새누리당 의원 전원이 정계 은퇴 선언을 할 상황까지도 몰릴 수 있는데 친박은 위기의식도 없이 자리만 챙긴다”면서 “그러니까 최순실이 저런 사람들 머리 꼭대기에서 국정을 농단한 것 아니냐. 계속 이러면 당을 같이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성태 의원은 TBS 라디오 인터뷰에서 “측근 세력들이 자성하고 국민에게 사죄하면서 박근혜 대통령과 함께 무한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새누리당은 앞으로 그냥 가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분당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정병국 의원은 CBS 라디오 인터뷰에서 “분당까지 가선 안 되겠지만 그런 각오를 하고 싸워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러나 친박계는 이 같은 비박계의 요구를 절대 수용할 수 없다고 맞서고 있다.
국정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위기에서 집권 여당의 지도부가 사퇴하는 것만큼 무책임한 태도가 없다는 게 친박계의 주장이다.
친박계는 또 비박계의 이 같은 요구가 당·청의 국정 공동책임 의무를 저버리고 계파의 이익만 바라보는 이기적인 행태라고 비난하고 있다.
한 친박계 당직자는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이 문제를 우선 수습하고 당을 쇄신해야지 무조건 사퇴하라고 하면 순수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면서 “그쪽에서 분당하자고 한다면 우리도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 다만 절을 떠나는 비박계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친박 핵심 의원은 김무성 전 대표가 비박계의 지도부 사퇴 요구의 배후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김무성 전 대표는 실패한 대표인데다 본인도 최순실을 알았으면서 지도부를 물러나라고 할 자격이 도대체 있다고 보느냐”고 비판했다.
만약 새누리당이 분당할 경우 대통령선거를 앞둔 정계개편의 핵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미 비박계 출신 인사들이 탈당해 몇몇 군소 정파를 구성한 상태이고 ‘제3지대’를 제도권에서 선점한 국민의당도 새누리당 비박계와 이념 및 정치 스펙트럼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권에서는 이미 정치권의 양대 주류였던 친박과 친노(친노무현)계를 배제한 나머지 세력의 통합을 통한 ‘중도정권’ 창출이라는 시나리오가 거론되고 있다.
실제로 새누리당 비박계는 친박계가 2선으로 물러나지 않은 상태로는 정권 재창출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만큼 내년 대선을 앞두고 다른 중도 세력과 정계 개편을 추진할 가능성이 작지만은 않다.
비박계가 친박 색깔의 새누리당을 그대로 놔두고 밖으로 뛰쳐나와 새 집을 지을 가능성도 없지 않고, 아니면 내부에서 친박계의 탈당을 유도하고 당명과 강령 등을 바꿔 중도세력 흡수를 추진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보수 세력 내에서 “집 나가면 시베리아”라는 금언이 통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결국 분당 논의는 ‘찻잔 속 태풍’이 될 것이란 관측도 만만치 않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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