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비리 공화국] 수학여행 계약 털면 ‘먼지’

[교육비리 공화국] 수학여행 계약 털면 ‘먼지’

입력 2010-08-20 00:00
수정 2010-08-20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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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역 초등학교 교장 5명중 1명꼴로 뒷돈 챙겨

”수학여행 업체 선정을 놓고 업자와 교장 간 뒷돈이 오간다는 첩보를 입수해 수사해보니 정말 뿌리 깊은 문제더군요.”

이규동 서울지방경찰청 수사과 지능1팀장은 지난해 9월부터 지난달까지 수학여행과 관련한 교육계 비리를 수사하면서 적잖이 놀랐다.

수사 결과 무려 138명의 전·현직 교장이 지속적인 계약의 대가로 여행·숙박 업체로부터 수십만 원에서 많게는 2천800만 원이 넘는 뒷돈을 챙긴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서울 지역은 초등학교 5개 중 1개꼴로 비리가 일어난 셈이다.

뒷돈은 학생 한 명당 8천 원~1만2천 원, 관광버스 한 대당 하루 2~3만 원으로 계산해 교장실에서 은밀하게 건네졌다.

이규동 팀장은 “한두 해 걸친 문제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이어온 관행으로, 드러나지 않아 문제가 되지 않았을 뿐”이라며 “교장 상당수는 금품 수수에 대해 잘못한 일이라고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도덕적인 해이가 심각했다”고 말했다.

‘장사꾼이 손해를 보는 장사는 하지 않는다’는 세간의 상식대로 모든 손해는 고스란히 학생들에게 돌아갔다.

수학여행지에서 학생들이 비좁은 방에서 불편한 잠을 자고 부실한 식판을 받아들어야 했던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경찰과 교육계 관계자들은 오랫동안 공공연한 비밀이던 수학여행 비리가 수면으로 떠오른 것일 뿐, 다른 지역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교육과학기술부가 2008년 서울지역 1천249개교를 조사한 결과 학교장이 수의계약으로 여행업체와 계약을 맺은 경우가 무려 85.5%에 달해 비리 발생의 여지가 큰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인천에서도 수학여행 알선 중개인으로부터 수십~수백만 원을 받아 챙긴 초등학교 교직원 30명이 경찰에 적발되는 등 수학여행 관련 계약은 ‘털면 비리가 나오는 영역’이 돼버렸다.

◇ 시설공사.기자재 계약 때도 뒷돈

비단 수학여행 업체 선정뿐만이 아니다.

학교의 각종 시설공사와 기자재 구매를 놓고 뒷돈이 오간다는 것도 공공연한 비밀이다.

지난해 9월 부적격 칠판을 사주는 대가로 뒷돈을 챙긴 서울지역의 전·현직 교장 19명이 경찰에 적발됐다.

2006년에는 광주, 2008년엔 대전에서 컴퓨터와 TV, 책상, 탁자 등 기자재를 사면서 시중가보다 비싼 가격에 특정업체와 계약한 사례가 무더기로 드러나는 등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경기도에서 실내 건축업체를 운영하는 송일식(가명) 씨는 “학교 시설공사 입찰에 참여하면서 ‘들러리만 서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입찰공고를 보고 수십~백여만 원을 들여 품평회 자료를 준비해 갔지만, 이미 학교에서 업체를 정해놓고 요식 행위만 하는 느낌을 받은 경우가 다반사였다는 것이다.

경기도 A 고등학교에서 발주한 2천여만 원의 교실 리모델링 사업 품평회에서는 교장이 일방적으로 한 업체 편들기에 나섰다고 한다.

송 대표는 “업체들이 준비한 내용은 비슷했는데, 교장이 다른 업체들이 설명을 할 땐 심하다 싶을 정도로 이런저런 꼬투리를 잡으며 험담하는 질문만 하더니 유독 한 업체가 발표할 땐 가만히 있었고 결국 그 업체가 되더라”며 “그날 교장의 태도를 보면서 ‘여긴 완전히 저 사람 왕국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떠올렸다.

다른 관공서에도 납품한 경험이 있는 송씨는 “관공서의 공개 입찰은 투명하고 납득할 수 있는 수준에서 이뤄지는 데 반해 유독 학교는 달랐다”면서 “명확한 기준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B 고등학교는 2천만 원 이상은 수의계약이 가능하도록 한 규정을 피하려 1억 원이 넘는 공사임에도 2천만 원 이하로 나눠 계약을 맺었고, C 초등학교에선 자격을 갖추지 못한 업체가 선정되는 일도 있었다.

동훈찬 전교조 정책실장은 “비리를 저지르겠다고 마음먹은 사람들은 법과 제도의 맹점을 정확하게 파악해 십분 활용한다”면서 “일반적인 제도 개선만으로는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라고 진단했다.

◇ 교장 전횡 견제 장치 대폭 정비해야

수학여행이나 공사.기자재 계약과 관련한 비리의 원인으로 교장에게 너무 많은 권한이 집중돼 있다는 점을 꼽는 사람들이 많다.

이규동 지능1팀장은 “학교엔 대부분 업체 선정을 심의하기 위한 기구가 설치돼 있었지만, 최종 결정 권한은 교장에게 있어 교장의 말 한마디에 결과가 결정됐다”면서 “자식을 맡긴 입장에서 다른 의견을 말하는 학부모나 인사평가자인 교장에게 대립각을 세우려는 교사는 찾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따라서 교장의 전횡을 견제하고 감시하기 위해서는 제도적 장치를 대폭 정비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숭희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는 “비리 교원에 대한 징계가 상당히 약한 현실에서 철저한 책임을 묻는 방법이 필요하다”면서 “한 번의 비리를 저지른 교원도 퇴출시킬 수 있게 도입한 ‘원스트라이크 아웃제’는 평가할 만하다”고 비위 교원의 엄벌을 강조했다.

이기종 국민대 교육학과 교수는 “학교가 원천적으로 계약 비리에서 자유롭기 위해서는 직접 수의계약을 하기보다는 정부의 조달시스템을 이용해 각 항목별 비용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올해 교과부는 수의계약 대상 범위를 2천만 원 이상에서 1천만 이상으로 확대하고, 국가전자조달시스템인 ‘나라장터(G2B)’와 학교맞춤형 전자조달시스템인 ‘학교장터(S2B)’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라는 지침을 내려 보냈다.

김동석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대변인은 “수학여행의 경우 다양한 루트의 소규모 테마 여행을 개발하는 것도 대규모 계약에 따른 비리 소지를 없앨 수 있는 방안”이라고 조언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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