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연평도 포격으로 장렬히 전사한 고(故) 서정우 하사의 어머니 김오복(50)씨는 21일 “젊은 사람들의 희생은 더이상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씨는 이날 연합뉴스와 전화통화에서 “어제 실시된 우리 군의 연평도 포 사격훈련 소식을 잘 알고 있다”면서 젊은 나이에 꽃을 피우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먼저 간 아들을 떠올리며 이같이 당부했다.
특히 전역을 1개월 가량 앞두고 숨진 아들의 제대 날짜가 내일이라며 “북의 도발이 없었다면 늠름하게 제대하는 아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을 텐데..”라며 안타까워했다.
김씨는 “군의 포 사격훈련은 당연히 해야 하고 (북에) 끌려 다녀서는 안된다.얼마든지 이해하고 동의한다”면서 “이런 일이 없을 때는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는데 (이런 일을 겪고 나니) 젊은 사람들의 희생이 너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젊은 아이들의 희생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부모에게는 한이 된다”며 북한의 추가 도발은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광주가 고향인 고 서정우 하사는 마지막 휴가를 가려고 선착장에서 배를 타려고 기다리다 북한이 쏜 포탄소리를 듣고 귀대,버스에서 가장 먼저 내렸다가 포탄 파편에 맞아 숨진 사실이 알려져 안타까움을 줬다.
연합뉴스
●”아들의 전사가 아직도 믿어지지 않아요”
“아직도 광욱이가 저 문을 열고 ‘아버지’,‘어머니’ 하며 달려 들어올 것만 같네요.”
지난달 23일 북한군의 연평도 포격으로 해병대 문광욱(20) 일병이 전사한 지 한 달이 다 돼가지만 문 일병의 가족들은 여전히 죽음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문 일병의 아버지 영조(47)씨는 근황을 묻자 “어떻게 자식을 잊을 수 있습니까.한 달이 거의 다 됐지만,아직도 아들의 죽음이 믿어지지 않아요”라고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문씨는 “요즘 아내와 함께 집안에 있어도 서로 말이 없습니다.아내가 밖으로 표를 내지 않으려고 무척이나 애쓰는 모습이 안타깝기만 해요”라고 말했다.
“광욱이 생각이 날까 봐 한국군의 해상사격 훈련이 보도된 어제도 TV를 아예 켜지 않았다”는 그는 “비통함이야말로 표현할 수 없다”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아들을 대전 현충원에 묻은 이후에 이틀에 한 번꼴로 묘소를 찾고 있다고 귀띔했다.
하지만,요즘 아내(45)의 건강이 나빠져 가족들이 크게 우려하고 있다고 전했다.아들의 죽음 소식에 충격을 받은 아내에게 우울증 증세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문씨는 “어제가 광욱이 생일이어서 하루 전인 일요일에 광욱이 친구들과 함께 케이크를 들고 대전 현충원을 다녀왔다”면서 “차디찬 땅속에 있는 아들을 생각하면 잠을 이룰 수 없다”며 고개를 떨군 채 한숨을 내쉬었다.
연합뉴스
●눈물도 말라버린 연평도 민간인희생자 유족
“아직도 어딘가에 살아있을 것만 같은데..”북한의 연평도 포격이 발생한 지 어느덧 1개월.
인천으로 몸을 피한 연평도 주민들이 지난 19일 경기도 김포시에 마련된 임시거처로 이주하고 인천시도 주민들의 입도에 맞춰 본격적인 복구작업을 실시하겠다는 계획을 밝히는 등 사태의 여파는 조금씩 수습되는 양상이다.
그러나 해병대 관사 신축공사 현장에서 참변을 당한 민간인 희생자 고(故) 김치백(61),배복철(60)씨 유가족의 마음에 남은 상처는 아물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숨진 김씨의 부인 강성애(57.인천 서구 신현동))씨는 21일 연합뉴스와 가진 통화에서 “가족들을 위해 고생만 하다가 어이없이 세상을 떠난 남편 생각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다”면서 “이젠 너무 울어 눈물도 안 나온다”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남편이 생전에 사용하던 휴대전화 번호를 눌러보기도 여러 차례.신호는 가지만 대답없는 벨소리에 강씨의 가슴은 하루에도 몇 번씩 무너져 내렸다.
시신 발견 후 장례를 치르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던 탓일까.강씨는 지난 한 달새 체중도 4~5kg이나 빠졌다고 했다.
고인들의 유해는 북한군의 포격 다음날인 지난달 24일 발견됐지만,위로금 지급액 등을 둘러싼 정부와 유족 간의 입장차 조율에 시간이 걸려 장례는 지난 6일에야 치러졌다.
강씨는 “그렇게 갑자기 가버릴 줄 알았더라면 좀 더 잘해줬어야 하는 건데..잘 해주지 못했던 것만 생각나 괴롭다”라며 목이 메었다.
남편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만큼 사랑했던 외손자 은혁(3)이는 아직도 수시로 외할아버지를 찾는다.외할아버지의 사진만 보면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하부지 보고싶어”를 외치는 은혁이의 모습은 가족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한다.
20일 실시된 연평해병부대의 해상 포사격훈련을 지켜보는 것도 유족들에게는 힘겨운 일이었다.자신들 같은 비극을 겪는 이가 또 나올까 하는 걱정에 가슴이 조마조마했기 때문이다.
강씨는 “어제 계속 TV를 지켜보며 가슴을 졸였다”면서 “그런 사고는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이라는 것을 이번 일을 겪으면서 깨달았다”라고 털어놨다.
아들 영모(30)씨도 “어제 사격훈련을 한다고 해서 아버지 일이 떠올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면서 “북측이 도발하면 피란가려고 짐까지 다 싸놨었다”라고 말했다.
김치백씨와 함께 숨진 채 발견된 고(故) 배복철씨의 유족들도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장례를 치른 지 보름이 지났지만,가족들은 아직 배씨를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었다.인천 동구 송림동에 사는 배씨의 누나(64)는 지금도 아침마다 밥을 떠놓고 동생을 추모하며 눈물을 흘린다.
배씨의 매형 전상철(60)씨는 “49제 치를 때까지 매일 정성껏 밥상을 차려 고인의 넋을 위로할 생각”이라면서 “처남이 생각날 때마다 아내와 함께 부평가족공원 납골당에 들르곤 한다”고 말했다.
전씨는 이어 “처남과는 가까운 동네에 살아 왕래가 잦았다”면서 “여름에 바다낚시도 종종 같이 가곤 했는데 이젠 누구랑 함께 가나...”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2010년 12월,겨울답지 않은 포근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지만 민간인 희생자 유족들은 그 어느 때보다 가슴시린 겨울을 보내고 있었다.
연합뉴스
김씨는 이날 연합뉴스와 전화통화에서 “어제 실시된 우리 군의 연평도 포 사격훈련 소식을 잘 알고 있다”면서 젊은 나이에 꽃을 피우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먼저 간 아들을 떠올리며 이같이 당부했다.
특히 전역을 1개월 가량 앞두고 숨진 아들의 제대 날짜가 내일이라며 “북의 도발이 없었다면 늠름하게 제대하는 아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을 텐데..”라며 안타까워했다.
김씨는 “군의 포 사격훈련은 당연히 해야 하고 (북에) 끌려 다녀서는 안된다.얼마든지 이해하고 동의한다”면서 “이런 일이 없을 때는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는데 (이런 일을 겪고 나니) 젊은 사람들의 희생이 너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젊은 아이들의 희생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부모에게는 한이 된다”며 북한의 추가 도발은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광주가 고향인 고 서정우 하사는 마지막 휴가를 가려고 선착장에서 배를 타려고 기다리다 북한이 쏜 포탄소리를 듣고 귀대,버스에서 가장 먼저 내렸다가 포탄 파편에 맞아 숨진 사실이 알려져 안타까움을 줬다.
연합뉴스
●”아들의 전사가 아직도 믿어지지 않아요”
“아직도 광욱이가 저 문을 열고 ‘아버지’,‘어머니’ 하며 달려 들어올 것만 같네요.”
지난달 23일 북한군의 연평도 포격으로 해병대 문광욱(20) 일병이 전사한 지 한 달이 다 돼가지만 문 일병의 가족들은 여전히 죽음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문 일병의 아버지 영조(47)씨는 근황을 묻자 “어떻게 자식을 잊을 수 있습니까.한 달이 거의 다 됐지만,아직도 아들의 죽음이 믿어지지 않아요”라고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문씨는 “요즘 아내와 함께 집안에 있어도 서로 말이 없습니다.아내가 밖으로 표를 내지 않으려고 무척이나 애쓰는 모습이 안타깝기만 해요”라고 말했다.
“광욱이 생각이 날까 봐 한국군의 해상사격 훈련이 보도된 어제도 TV를 아예 켜지 않았다”는 그는 “비통함이야말로 표현할 수 없다”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아들을 대전 현충원에 묻은 이후에 이틀에 한 번꼴로 묘소를 찾고 있다고 귀띔했다.
하지만,요즘 아내(45)의 건강이 나빠져 가족들이 크게 우려하고 있다고 전했다.아들의 죽음 소식에 충격을 받은 아내에게 우울증 증세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문씨는 “어제가 광욱이 생일이어서 하루 전인 일요일에 광욱이 친구들과 함께 케이크를 들고 대전 현충원을 다녀왔다”면서 “차디찬 땅속에 있는 아들을 생각하면 잠을 이룰 수 없다”며 고개를 떨군 채 한숨을 내쉬었다.
연합뉴스
●눈물도 말라버린 연평도 민간인희생자 유족
“아직도 어딘가에 살아있을 것만 같은데..”북한의 연평도 포격이 발생한 지 어느덧 1개월.
인천으로 몸을 피한 연평도 주민들이 지난 19일 경기도 김포시에 마련된 임시거처로 이주하고 인천시도 주민들의 입도에 맞춰 본격적인 복구작업을 실시하겠다는 계획을 밝히는 등 사태의 여파는 조금씩 수습되는 양상이다.
그러나 해병대 관사 신축공사 현장에서 참변을 당한 민간인 희생자 고(故) 김치백(61),배복철(60)씨 유가족의 마음에 남은 상처는 아물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숨진 김씨의 부인 강성애(57.인천 서구 신현동))씨는 21일 연합뉴스와 가진 통화에서 “가족들을 위해 고생만 하다가 어이없이 세상을 떠난 남편 생각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다”면서 “이젠 너무 울어 눈물도 안 나온다”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남편이 생전에 사용하던 휴대전화 번호를 눌러보기도 여러 차례.신호는 가지만 대답없는 벨소리에 강씨의 가슴은 하루에도 몇 번씩 무너져 내렸다.
시신 발견 후 장례를 치르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던 탓일까.강씨는 지난 한 달새 체중도 4~5kg이나 빠졌다고 했다.
고인들의 유해는 북한군의 포격 다음날인 지난달 24일 발견됐지만,위로금 지급액 등을 둘러싼 정부와 유족 간의 입장차 조율에 시간이 걸려 장례는 지난 6일에야 치러졌다.
강씨는 “그렇게 갑자기 가버릴 줄 알았더라면 좀 더 잘해줬어야 하는 건데..잘 해주지 못했던 것만 생각나 괴롭다”라며 목이 메었다.
남편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만큼 사랑했던 외손자 은혁(3)이는 아직도 수시로 외할아버지를 찾는다.외할아버지의 사진만 보면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하부지 보고싶어”를 외치는 은혁이의 모습은 가족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한다.
20일 실시된 연평해병부대의 해상 포사격훈련을 지켜보는 것도 유족들에게는 힘겨운 일이었다.자신들 같은 비극을 겪는 이가 또 나올까 하는 걱정에 가슴이 조마조마했기 때문이다.
강씨는 “어제 계속 TV를 지켜보며 가슴을 졸였다”면서 “그런 사고는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이라는 것을 이번 일을 겪으면서 깨달았다”라고 털어놨다.
아들 영모(30)씨도 “어제 사격훈련을 한다고 해서 아버지 일이 떠올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면서 “북측이 도발하면 피란가려고 짐까지 다 싸놨었다”라고 말했다.
김치백씨와 함께 숨진 채 발견된 고(故) 배복철씨의 유족들도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장례를 치른 지 보름이 지났지만,가족들은 아직 배씨를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었다.인천 동구 송림동에 사는 배씨의 누나(64)는 지금도 아침마다 밥을 떠놓고 동생을 추모하며 눈물을 흘린다.
배씨의 매형 전상철(60)씨는 “49제 치를 때까지 매일 정성껏 밥상을 차려 고인의 넋을 위로할 생각”이라면서 “처남이 생각날 때마다 아내와 함께 부평가족공원 납골당에 들르곤 한다”고 말했다.
전씨는 이어 “처남과는 가까운 동네에 살아 왕래가 잦았다”면서 “여름에 바다낚시도 종종 같이 가곤 했는데 이젠 누구랑 함께 가나...”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2010년 12월,겨울답지 않은 포근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지만 민간인 희생자 유족들은 그 어느 때보다 가슴시린 겨울을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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