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 죽고 저만 살아서” 급발진 의심사고 첫 재판…할머니의 호소

“손자 죽고 저만 살아서” 급발진 의심사고 첫 재판…할머니의 호소

권윤희 기자
권윤희 기자
입력 2023-05-23 17:34
수정 2023-05-23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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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 사망 ‘급발진 의심 사고’ 첫 재판
원고 측 “전형적인 급발진” 강조
제조사 측, 손해배상 책임 부인
운전자 할머니 “죄책감에 살 수 없어” 호소
전국에서 모인 탄원서 1만 7000여부

아이고, 이게 왜 안 돼. 겁이 난다. 엄마, 이게 안 돼. 도현아. 도현아, 도현아, 도현아.
지난해 12월 6일 강릉 홍제동에서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한 대가 갑자기 ‘웽’하는 굉음과 함께 하얀 배기가스를 분출하며 앞서가던 차량을 들이받았다. 해당 SUV는 1차 추돌 이후에도 속도를 줄이지 못한 채 600m가량을 더 주행했고, 다른 차들을 피해 달리다 왕복 4차로 도로를 넘어 지하 통로에 추락한 뒤에야 멈췄다. 이 사고로 운전자인 68세 할머니 A씨가 크게 다쳤고, 조수석에 타고 있던 12살 손자는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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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강원 강릉에서 발생한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의 급발진 의심 사고 현장. 연합뉴스
지난해 12월 강원 강릉에서 발생한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의 급발진 의심 사고 현장. 연합뉴스
차량 급발진이 의심되는 이 사고 관련 첫 재판이 23일 오후 춘천지법 강릉지원에서 열렸다. 사고의 책임 소재를 둘러싼 민사소송의 첫 재판에서 운전자 측은 차량 결함으로 인한 급발진 사고라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춘천지법 강릉지원 민사2부(부장 박재형)는 이날 차량 운전자와 그 가족들이 제조사를 상대로 낸 약 7억 6000만원 규모 손해배상 청구 사건 첫 변론기일을 열었다. 원고 측 소송대리를 맡은 법률사무소 나루 하종선 변호사는 재판에서 전형적인 급발진 사고임을 강조했다.

하 변호사는 “이 사건은 급발진의 전형적인 4가지 요소를 지니고 있다”며 ‘웽’하는 굉음과 머플러(소음기)에서 흘러나온 액체, 도로상 타이어 자국, 흰 연기를 언급했다.

이어 “블랙박스에는 차량 오작동을 나타내는 운전자의 음성이 녹음돼 있다”며 “30초간 지속된 급발진 사고”라고 강조했다. 가속 페달 오조작 가능성에 대해서는 “인체공학적 분석과 경험칙에 반한다”고 일축했다.
지난해 12월 강원 강릉에서 발생한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의 급발진 의심 사고 관련 블랙박스 영상. JTBC ‘한문철의 블랙박스 리뷰’
지난해 12월 강원 강릉에서 발생한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의 급발진 의심 사고 관련 블랙박스 영상. JTBC ‘한문철의 블랙박스 리뷰’
반면 피고 측 소송대리인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의 감정 결과를 확인한 뒤 상세히 반박하겠다’는 뜻과 함께 “사건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구체적인 서면을 준비 중이며, 최대한 신속히 제출하겠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소장을 1월에 접수한 점과 3월에 변론기일을 통지했던 점을 들어 “피고가 신속히 대응하지 않은 측면이 있어 이로 인한 불이익은 감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원고 측이 제출한 사고기록장치(EDR) 감정과 음향분석 감정을 모두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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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급발진 의심 사고 선처 탄원서
강릉 급발진 의심 사고 선처 탄원서 지난해 12월 강릉에서 발생한 차량 급발진 의심 사고의 책임 소재를 둘러싼 민사소송의 첫 재판이 23일 오후 춘천지법 강릉지원에서 열렸다. 사진은 전국에서 모인 탄원서 1만 7000여부 모습. 2023.5.23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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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급발진 의심 사고 선처 탄원서
강릉 급발진 의심 사고 선처 탄원서 지난해 12월 강릉에서 발생한 차량 급발진 의심 사고의 책임 소재를 둘러싼 민사소송의 첫 재판이 23일 오후 춘천지법 강릉지원에서 열렸다. 사진은 전국에서 모인 탄원서 1만 7000여부 현황. 2023.5.23 연합뉴스
원고 측은 사고 5초 전 차량의 속도가 110㎞인 상태에서 분당 회전수(RPM)가 5500까지 올랐으나 ‘속도가 거의 증가하지 않은’ 사실과 ‘가속 페달을 밟았다’는 국과수의 EDR 검사 결과가 모순되는 점을 통해 EDR의 신뢰성 상실을 증명하고자 EDR 감정을 신청했다.

또 정상적인 급가속 시 엔진 소리와 이번 사고에서의 엔진 소리 간 음향 특성이 다른 점 등을 밝히고자 음향분석 감정도 신청했다.

재판부는 6월 27일을 다음 변론기일로 지정하고, 이때 전문 감정인을 선정해 감정에 필요한 부분을 특정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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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강릉에서 차량 급발진 의심 사고로 12살 손자를 잃고, 교통사고처리 특례법상 치사 혐의로 입건된 60대 할머니가 20일 첫 경찰조사를 마치고 아들의 부축을 받으며 경찰서를 떠나고 있다. 2023.3.20 연합뉴스
지난해 12월 강릉에서 차량 급발진 의심 사고로 12살 손자를 잃고, 교통사고처리 특례법상 치사 혐의로 입건된 60대 할머니가 20일 첫 경찰조사를 마치고 아들의 부축을 받으며 경찰서를 떠나고 있다. 2023.3.20 연합뉴스
손자를 잃고 저만 살아남아서 미안 …저는 죄인
이날 재판에서는 운전자 A씨와, 사고로 자식을 잃은 A씨의 아들이 발언권을 얻어 진실 규명을 호소했다.

A씨는 “사랑하는 손자를 잃고 저만 살아남아서 미안하고 가슴이 미어진다. 누가 일부러 사고를 내 손자를 잃겠느냐. 제 과실로 사고를 냈다는 누명을 쓰고는 죄책감에 살아갈 수 없다. 재판장님께서 진실을 밝혀주시길 간절히 바란다”고 하소연했다. 이어 “저는 죄인입니다. 손자가 살았어야 했는데…”라며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A씨의 아들은 “‘강한 것이 옳은 것을 이겨온 사회’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자동차 급발진 사고”라며 “급발진 사고 원인을 전적으로 운전자에게 입증하게 하는 자체가 모순된 행위이며 폭력”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언제까지 제조사의 이권과 횡포 앞에 국민의 소중한 생명의 가치가 도외시돼야 하느냐”며 “대한민국에서 급발진 사고는 가정파괴범이자 연쇄살인범”이라고 울분을 토했다.

끝으로 “부디 이번 사고의 원인을 철저히 규명해주시고, 대한민국은 ‘옳은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사회’라는 것을 알려달라”며 “급발진 사고 시 승소한 첫 사례가 되어 다시는 제조사가 방관하고 묵과하지 않도록 법 개정이 반드시 이뤄질 수 있도록 국회의원분들께도 간곡히 호소한다”고 말했다.

원고 측은 전국에서 모인 탄원서 약 1만 7000장도 재판부에 제출했다.

A씨는 지난해 사고 후 교통사고처리 특례법상 치사 혐의로 입건돼 올해 3월 경찰조사를 받았다. A씨가 크게 다쳤음에도 교통사고처리 특례법상 치사 혐의로 입건되고 급발진이 의심된다는 내용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A씨 가족이 올해 2월 국회 국민동의 청원에 올린 글은 일주일도 안 돼 5만명이 동의하며 관련법 개정 논의를 위한 발판이 마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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