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명의로 입금한 돈 실소유주 부친이 인출해도 은행 책임 없어
장기간 실질적으로 거래해 온 차명계좌의 실소유주가 예금된 돈을 인출했다면 계좌 명의자가 이의를 제기해도 은행이 이를 변상할 의무는 없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오는 29일 차명거래를 원칙적으로 금지한 개정 금융실명제법 시행을 앞두고 향후 차명계좌의 소유권을 둘러싼 법적 분쟁이 잦아질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법원이 오랜 기간 실질적 거래를 해온 차명계좌주의 인출권한을 인정해준 것이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2부(홍이표 부장판사)는 이모(63)씨가 A은행을 상대로 낸 예금채권 반환소송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고 23일 밝혔다.
A은행에는 이씨 이름으로 된 계좌가 8개 있었다.
이씨는 자신의 부친이 이들 계좌에서 1억5천500만원을 찾아가자 명의자는 자신인데 은행이 허락 없이 부친에게 돈을 인출해줬다며 소송을 냈다.
그러나 은행 측은 해당 계좌에 실제로 돈을 입금하고, 비밀번호와 도장 등을 관리해온 것은 이씨의 부친이므로 실소유주는 부친으로 볼 수 있다며 맞섰다.
실제로 A은행에 이씨의 주민등록증 사본 등 서류를 제시하고 이씨 명의로 계좌를 개설한 것은 이씨의 부친이었다. 차명계좌인 셈이다.
재판부는 “금융실명제법에 따르면 실명 확인 절차를 거쳐 예금 계약을 체결한 경우 일반적으로 예금명의자를 계약의 당사자로 봐야 한다”며 “문제가 된 8개 계좌의 계약당사자는 명의자인 이씨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전제했다.
재판부는 그러나 이씨 부친이 민법에서 정한 채권을 행사할 정당한 권한이 있는 ‘준점유자’에 해당하므로 은행이 돈을 반환할 의무는 없다고 봤다.
재판부는 “이씨의 부친은 1997년부터 A은행에 아들이나 손자 명의로 계좌를 개설해 돈을 맡겨왔다”며 “오랜 기간 특정지점과 거래하면서 직원들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씨 외에는 다른 계좌 명의자들은 십수년간 이런 거래에 대해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며 “이런 점을 고려하면 이씨 부친은 해당 계좌의 준점유자에 해당하고, 은행으로서는 부친에게 예금 수령권한이 있는 것으로 믿을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이어 “은행은 이씨 부친이 제시한 도장과 비밀번호를 확인한 뒤 돈을 인출해줬다”며 “비밀번호까지 일치하면 은행으로서는 예금인출 권한에 대해 의심을 하기 어려운 만큼, 인출 과정에서 은행의 과실이 있었다고도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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