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하순 북한 노동당 대표자회를 통해 중용된 인물 중 홍석형(74) 당 계획재정부장(전 함북도당 책임비서)은 특히 눈여겨볼 만하다.
올해 초반 화폐개혁 실패의 책임자로 몰려 처형된 박남기의 후임자로서 난국에 처한 북한 경제를 다시 세울 ‘구원투수’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홍석형은 당 계획재정부장에다 추가로 당 정치국 위원과 당 비서(경제담당 추정) 자리까지 일거에 거머쥐어,이제 막 윤곽을 드러낸 김정은 후계체제의 첫 ‘경제브레인’으로 급부상했다.
홍석형의 이 같은 도약은 우선 산업현장의 밑바닥부터 다져온 실무 경험과 1990년대 중반 국가계획위원장으로서 북한의 경제발전계획을 총괄했던 경륜을 평가받은 결과로 분석된다.
다시 말해 개혁·개방 같은 변화의 모색보다,식량 등 기초재화의 수급 조절과 경제정책의 안정적 관리에 무게가 실린 발탁이라는 얘기다.
‘김정일 체제’의 대표적 경제통인 개혁 성향의 박봉주 전 내각 총리와 보수 성향의 박남기 전 계획재정부장이 차례로 실각한 뒤 바통을 이어받았다는 점을 봐도 홍석형에게 개혁·개방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소설 ‘림꺽정’의 저자 홍명희의 손자인 홍석형은 북한의 고위층 인사 가운데 유일한 남한 출신이며,모스크바로 유학을 다녀온 이후 1984년 정무원(내각 전신) 금속공업부 제1부부장으로 발탁되기 전까지 줄곧 김책제철연합기업소에서 일한 ‘철강맨’이기도 하다.
특히 김책제철연합기업소 책임비서 시절 소신있는 업무 처리와 진중한 성격으로 제철소의 급성장을 이끌어 고 김일성 주석의 눈에 들었다는 ‘설’도 있다.
지방에서 잔뼈가 굵은 그가 중앙무대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93년 12월 북한의 경제발전계획 수립을 총괄하던 국가계획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으면서이다.
당시 3차 7개년계획을 막 끝낸 북한은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실패를 확인하고 참담한 심정으로 김달현 위원장을 문책 경질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홍석형이 국가계획위원장을 맡은 시기는 불운하게도,수백만 명의 주민들이 굶어죽을 만큼 북한 경제가 피폐해졌던 이른바 ‘고난의 행군’ 초입 무렵이었다.누가 그 자리를 맡든 경제발전은 고사하고 현상 유지도 어려웠던 상황이었던 것이다.
힘든 자리에서 4년9개월을 버티다 1998년 9월 물러난 홍석형은 그후 2년 반 정도 공직에서 완전히 밀려났다가 2001년 북한 최대 공업단지를 끼고 있는 함경북도의 당 책임비서로 재기했다.
이런 홍석형과 ‘비운의 테크노크라트’ 박남기 사이의 ‘악연’과 연속된 반전은 매우 흥미롭다.
1993년 홍석형이 처음 국가계획위원장으로 발탁됐을 때 박남기는 경제정책 실패의 책임을 지고 당 경제담당 비서에서 해임됐으나 1998년 홍석형이 국가계획위원장에서 물러날 때는 박남기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후 박남기는 당 비서와 계획재정부장으로 10년 넘게 승승장구하는 듯했지만 결국 화폐개혁 실패의 희생양으로 몰려 다시 홍석형에게 자리를 내줬다.
연합뉴스
올해 초반 화폐개혁 실패의 책임자로 몰려 처형된 박남기의 후임자로서 난국에 처한 북한 경제를 다시 세울 ‘구원투수’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홍석형은 당 계획재정부장에다 추가로 당 정치국 위원과 당 비서(경제담당 추정) 자리까지 일거에 거머쥐어,이제 막 윤곽을 드러낸 김정은 후계체제의 첫 ‘경제브레인’으로 급부상했다.
홍석형의 이 같은 도약은 우선 산업현장의 밑바닥부터 다져온 실무 경험과 1990년대 중반 국가계획위원장으로서 북한의 경제발전계획을 총괄했던 경륜을 평가받은 결과로 분석된다.
다시 말해 개혁·개방 같은 변화의 모색보다,식량 등 기초재화의 수급 조절과 경제정책의 안정적 관리에 무게가 실린 발탁이라는 얘기다.
‘김정일 체제’의 대표적 경제통인 개혁 성향의 박봉주 전 내각 총리와 보수 성향의 박남기 전 계획재정부장이 차례로 실각한 뒤 바통을 이어받았다는 점을 봐도 홍석형에게 개혁·개방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소설 ‘림꺽정’의 저자 홍명희의 손자인 홍석형은 북한의 고위층 인사 가운데 유일한 남한 출신이며,모스크바로 유학을 다녀온 이후 1984년 정무원(내각 전신) 금속공업부 제1부부장으로 발탁되기 전까지 줄곧 김책제철연합기업소에서 일한 ‘철강맨’이기도 하다.
특히 김책제철연합기업소 책임비서 시절 소신있는 업무 처리와 진중한 성격으로 제철소의 급성장을 이끌어 고 김일성 주석의 눈에 들었다는 ‘설’도 있다.
지방에서 잔뼈가 굵은 그가 중앙무대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93년 12월 북한의 경제발전계획 수립을 총괄하던 국가계획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으면서이다.
당시 3차 7개년계획을 막 끝낸 북한은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실패를 확인하고 참담한 심정으로 김달현 위원장을 문책 경질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홍석형이 국가계획위원장을 맡은 시기는 불운하게도,수백만 명의 주민들이 굶어죽을 만큼 북한 경제가 피폐해졌던 이른바 ‘고난의 행군’ 초입 무렵이었다.누가 그 자리를 맡든 경제발전은 고사하고 현상 유지도 어려웠던 상황이었던 것이다.
힘든 자리에서 4년9개월을 버티다 1998년 9월 물러난 홍석형은 그후 2년 반 정도 공직에서 완전히 밀려났다가 2001년 북한 최대 공업단지를 끼고 있는 함경북도의 당 책임비서로 재기했다.
이런 홍석형과 ‘비운의 테크노크라트’ 박남기 사이의 ‘악연’과 연속된 반전은 매우 흥미롭다.
1993년 홍석형이 처음 국가계획위원장으로 발탁됐을 때 박남기는 경제정책 실패의 책임을 지고 당 경제담당 비서에서 해임됐으나 1998년 홍석형이 국가계획위원장에서 물러날 때는 박남기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후 박남기는 당 비서와 계획재정부장으로 10년 넘게 승승장구하는 듯했지만 결국 화폐개혁 실패의 희생양으로 몰려 다시 홍석형에게 자리를 내줬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