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책으로 보는 마음 이야기
‘내가 함께 있을게’가 말하는 죽음의 의미
죽음 받아들이는 자세가 삶의 태도 결정
피할 수 없는 안식처로 받아들여야
#편집자 주 당신의 마음은 안녕하신가요? ‘오늘하루 마음읽기’에서는 날씨처럼 시시각각 변하는 우리 마음속 이야기를 젊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4명이 친절하게 읽어 드립니다. 다섯번째 회에서는 그림책 ‘내가 함께 있을게’를 통해 어둠처럼만 보이는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함께 고민해봅니다. 정정엽 정신건강의학 전문의가 들려드립니다.
누구나 제 죽음을 상상해본 적이 한 번쯤 있다. 하지만 죽음이 무엇인지, 어떤 것인지 말하기란 아무리 오래 산 노인이라도 어려울 것이다. ‘죽음’이라는 소재는 어렵고 철학적으로 느껴지며, 어린아이들과 무관해 보이지만 어린아이들도 죽음을 생각하고 궁금해한다. 죽음을 경험한 사람의 이야기는 존재할 수 없다는 면에서 ‘죽음’은 두려움과 회피의 대상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할수록 그와 반대되는 삶의 소중함을 칭송한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생각은 저 먼 곳으로 떨어뜨려 놓는다.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곧 삶의 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로 죽음과 삶이 반대되는 개념일까?
●오리를 졸졸 따르는 죽음, 늘 곁에 있는 존재
죽음으로 상징되는 캐릭터는 대표적으로 저승사자, 귀신, 해골 등 무섭고 어두운 이미지로 그려진다. 아동문학가 볼프 에를브루후(Wolf Erlbruch)의 그림책 ‘내가 함께 있을게’에서도 마찬가지다. ‘죽음’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은 해골의 형상에 긴 옷을 입은 모습으로 또 다른 주인공 오리를 찾아온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던 죽음의 이미지처럼 눈을 희번덕거리며 치켜뜨거나 겁을 주지는 않는다. 언제나 함께했다는 듯이 침착하게 말을 걸며 등장한다. 그럼에도 오리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죽음은 끝이기에 불안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어서다.
얼마 전부터 오리는 느낌이 이상했습니다.
“대체 누구야? 왜 내 뒤를 슬그머니 따라다니는 거야?”
“와, 드디어 내가 있는 걸 알아차렸구나. 나는 죽음이야.”
죽음이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삶과 죽음이 대척점에 있거나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삶과 죽음은 같이 간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동시에 죽어가고 있다. 한 걸음 삶을 나아갈수록 죽음에도 가까워진다. 뒤집어 생각해보면, 죽음이라는 끝이 있기에 정성을 들여 살아간다고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죽음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
●‘죽음’ 개념 잘 세워야 진짜 행복한 삶 살 수 있어
죽음에 대한 생각은 곧 삶에 대한 태도이다. 죽음을 두렵고 불안하고 힘든 것, 즉 인생의 결말쯤으로만 생각한다면 삶도 그렇게 대하게 된다. 우리는 잘 사는 것에서 나아가 잘 죽는 것을 고민해야 한다. 죽음을 잘 마주해야 한다는 생각은 곧 어떻게
해야 잘 사는 것일까 하는 답변으로 이어질 것이다.
산다는 것은 죽음에 다다르는 과정이며 삶과 죽음은 동시에 완성된다. 만약에 죽음이라는 게 정말로 의미가 없고 초라하고 비참한 일이라면, 열심히 살거나 잘 살아야겠다는 뜻을 누가 지니겠는가. 물론 죽음이라는 상황을 개인마다 어떠한 방식으로 마주하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경건하고 안락하게 죽을 수 있다면, 죽음이 그런 것이라고 믿는다면 ‘잘 사는 것’에 대한 기준이 자신에게 적합한 쪽으로 재정립되지 않을까? 학벌, 직업 등으로 대표되는 사회적 틀에서 벗어나, 자신이 어디서 행복을 느끼는지 질문을 던지며 제대로 죽기 위한 준비를 말이다.
‘죽음’을 회피하고 불안을 느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잘 찾아가야 하는 안식처로 인식해야 한다. 말처럼 쉽지만은 않지만 우리는 삶과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기에 그러한 태도가 분명히 필요하다.
세상에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는 엄마와 자신을 하나로 생각하다가, 뒤집기를 하고 기는 것을 배우고 성장하면서 엄마에게서 멀어진다. 기는 법을 배운 아이는 기어가면서도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엄마를 확인한다. 또한 기는 법을 완전히 익힌 후에도 아주 멀리 가지 않고 엄마가 자신을 찾을 수 있는 곳까지만 기어간다.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알고 있으면서도 자꾸만 확인하는 것. 우리에게 죽음이란, 이제 막 기어가는 아이에게 엄마와 같은 역할과 같다.
“추워? 내가 따뜻하게 해 줄까?”
오리가 물었습니다.
아무도 죽음에게 그런 제안을 해 준 적이 없었습니다.
한 주 한 주 흐를수록 둘이 연못에 가는 일이 드물어졌습니다.
어딘가 풀 속에 앉아 있는 때가 많았습니다. 말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서늘한 바람이 깃털 속으로 파고들었습니다.
오리는 문득 추위를 느꼈습니다.
“추워. 나를 좀 따뜻하게 해 줄래?”
오리가 말했습니다.
‘내가 함께 있을게’에서 오리는 처음에 자신을 갑자기 찾아온 죽음을 두려워하고 의심한다. 하지만 무엇이든 함께 하면서 자신의 죽음을 존경하고 소중하게 여기게 된다. 죽음은 언제나 삶과 함께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을 얻었을 때, 오리는 죽음이 따뜻할 수 있도록 포옹할 수 있게 된다. 죽음과 오리의 관계는 한 개인과 개인이 친해지는 과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게 주로 향해 있던 시선을 상대방에게 돌려야 한다. 상대를 존중하고, 상대를 통해 자신을 바라볼 수 있을 때 진정한 친구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죽음을 통해 삶을 생각하는 것은 곧 죽음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와 같다.
오리는 죽기 전날, 죽음에게 자신을 따뜻하게 해 달라고 말한다. 오리가 죽음을 안아주었던 것과 같이, 죽음이라는 인물에게 오리의 죽음을 보는 것은 또 다른 죽음의 삶인 것이다.
필자인 정정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현재 광화문숲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을 맡고 있다. 현직 의사들이 직접 글을 쓰는 정신의학신문을 창간했으며 마음 아픈 사람들이 주저없이 전문가의 도움을 구할 수 있도록 정신과 치료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없애려 노력하고 있다. 저서로는 ‘내 마음은 내가 결정합니다’가 있다.
‘내가 함께 있을게’가 말하는 죽음의 의미
죽음 받아들이는 자세가 삶의 태도 결정
피할 수 없는 안식처로 받아들여야
계단을 오르는 노인의 모습.
출처 : 픽사베이
출처 : 픽사베이
누구나 제 죽음을 상상해본 적이 한 번쯤 있다. 하지만 죽음이 무엇인지, 어떤 것인지 말하기란 아무리 오래 산 노인이라도 어려울 것이다. ‘죽음’이라는 소재는 어렵고 철학적으로 느껴지며, 어린아이들과 무관해 보이지만 어린아이들도 죽음을 생각하고 궁금해한다. 죽음을 경험한 사람의 이야기는 존재할 수 없다는 면에서 ‘죽음’은 두려움과 회피의 대상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할수록 그와 반대되는 삶의 소중함을 칭송한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생각은 저 먼 곳으로 떨어뜨려 놓는다.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곧 삶의 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로 죽음과 삶이 반대되는 개념일까?
●오리를 졸졸 따르는 죽음, 늘 곁에 있는 존재
죽음으로 상징되는 캐릭터는 대표적으로 저승사자, 귀신, 해골 등 무섭고 어두운 이미지로 그려진다. 아동문학가 볼프 에를브루후(Wolf Erlbruch)의 그림책 ‘내가 함께 있을게’에서도 마찬가지다. ‘죽음’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은 해골의 형상에 긴 옷을 입은 모습으로 또 다른 주인공 오리를 찾아온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던 죽음의 이미지처럼 눈을 희번덕거리며 치켜뜨거나 겁을 주지는 않는다. 언제나 함께했다는 듯이 침착하게 말을 걸며 등장한다. 그럼에도 오리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죽음은 끝이기에 불안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어서다.
얼마 전부터 오리는 느낌이 이상했습니다.
“대체 누구야? 왜 내 뒤를 슬그머니 따라다니는 거야?”
“와, 드디어 내가 있는 걸 알아차렸구나. 나는 죽음이야.”
죽음이 말했습니다.
‘내가 함께 있을게’에서는 죽음이 오리의 곁을 맴돈다. 죽음은 겁을 주는 대신 침착하게 말을 건다.
웅진주니어
웅진주니어
●‘죽음’ 개념 잘 세워야 진짜 행복한 삶 살 수 있어
죽음에 대한 생각은 곧 삶에 대한 태도이다. 죽음을 두렵고 불안하고 힘든 것, 즉 인생의 결말쯤으로만 생각한다면 삶도 그렇게 대하게 된다. 우리는 잘 사는 것에서 나아가 잘 죽는 것을 고민해야 한다. 죽음을 잘 마주해야 한다는 생각은 곧 어떻게
해야 잘 사는 것일까 하는 답변으로 이어질 것이다.
산다는 것은 죽음에 다다르는 과정이며 삶과 죽음은 동시에 완성된다. 만약에 죽음이라는 게 정말로 의미가 없고 초라하고 비참한 일이라면, 열심히 살거나 잘 살아야겠다는 뜻을 누가 지니겠는가. 물론 죽음이라는 상황을 개인마다 어떠한 방식으로 마주하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경건하고 안락하게 죽을 수 있다면, 죽음이 그런 것이라고 믿는다면 ‘잘 사는 것’에 대한 기준이 자신에게 적합한 쪽으로 재정립되지 않을까? 학벌, 직업 등으로 대표되는 사회적 틀에서 벗어나, 자신이 어디서 행복을 느끼는지 질문을 던지며 제대로 죽기 위한 준비를 말이다.
‘죽음’을 회피하고 불안을 느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잘 찾아가야 하는 안식처로 인식해야 한다. 말처럼 쉽지만은 않지만 우리는 삶과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기에 그러한 태도가 분명히 필요하다.
세상에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는 엄마와 자신을 하나로 생각하다가, 뒤집기를 하고 기는 것을 배우고 성장하면서 엄마에게서 멀어진다. 기는 법을 배운 아이는 기어가면서도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엄마를 확인한다. 또한 기는 법을 완전히 익힌 후에도 아주 멀리 가지 않고 엄마가 자신을 찾을 수 있는 곳까지만 기어간다.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알고 있으면서도 자꾸만 확인하는 것. 우리에게 죽음이란, 이제 막 기어가는 아이에게 엄마와 같은 역할과 같다.
“추워? 내가 따뜻하게 해 줄까?”
오리가 물었습니다.
아무도 죽음에게 그런 제안을 해 준 적이 없었습니다.
한 주 한 주 흐를수록 둘이 연못에 가는 일이 드물어졌습니다.
어딘가 풀 속에 앉아 있는 때가 많았습니다. 말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서늘한 바람이 깃털 속으로 파고들었습니다.
오리는 문득 추위를 느꼈습니다.
“추워. 나를 좀 따뜻하게 해 줄래?”
오리가 말했습니다.
책 ‘내가 함께 있을게’의 표지
웅진주니어
웅진주니어
오리는 죽기 전날, 죽음에게 자신을 따뜻하게 해 달라고 말한다. 오리가 죽음을 안아주었던 것과 같이, 죽음이라는 인물에게 오리의 죽음을 보는 것은 또 다른 죽음의 삶인 것이다.
필자인 정정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현재 광화문숲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을 맡고 있다. 현직 의사들이 직접 글을 쓰는 정신의학신문을 창간했으며 마음 아픈 사람들이 주저없이 전문가의 도움을 구할 수 있도록 정신과 치료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없애려 노력하고 있다. 저서로는 ‘내 마음은 내가 결정합니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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